죄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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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새벽기도에 오신 성도님 여러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통해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지금 이스라엘과 전쟁을 해야 하는 곤란한 입장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상황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실지 기대하도록 합니다.
1- 성도는 세상 가운데서 죄에 물들게 된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성도는 세상 가운데에서 죄에 물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울이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통해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이 나온 이후에 등장합니다. 다윗이 블레셋 땅에서 블레셋 다섯 왕 중 한명인 아기스의 신임을 받았습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 아벡이라는 곳에 진을 칩니다. 아기스는 다윗과 함께 이스라엘을 치려고 합니다. 어제 본문에서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고 했는데 다윗은 이제 이스라엘을 공격해야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처음에는 이스라엘 땅 안에 있으면 사울에게 계속 쫓기니까 그 쫓기는 생활이 너무 지긋지긋해서 사울이 다가갈 엄두도 못내는 블레셋 땅에 들어온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블레셋 땅에 있으면서 시글락 성을 달라고 그러고 시글락에서 머물면서 아기스의 호의를 얻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공격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세상 가운데 머물며 세상의 호의를 얻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다가 지금은 이스라엘의 운명이 걸린 전쟁에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입장으로까지 서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죄의 속성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죄는 적당한 것이 없습니다. 늪처럼 점점 빠져듭니다. 블레셋 땅에서 시글락 성으로 그리고 이스라엘과 전쟁을 할 지경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 블레셋 편에 서 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동안 기름 부음 받은 사울에게 고난 당하면서도 그를 살리기 위해 몸부림 쳤던 것이 모두 허사가 되어 버립니다. 죄는 적당한 게 없습니다. 이때까지 행했던 것을 다 덮을 정도로 끈질기고 집요합니다. 이런 죄의 속성에 대해서 시편 1편 1절에서 어떤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죄의 길을 따라 걷다가 죄의 길에 서다가 마지막에는 죄의 자리에 눌러 앉게 됩니다. 죄는 적당한 것이 없습니다. 세상 가운데서 죄를 지으며 살게 되면 계속해서 죄에 물들게 됩니다. 죄는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기피해야 할 대상이고 극복해야 할 대상입니다.
(적용) 우리는 세상속에서 살아가지만 그 가운데서 죄 짓지 않도록 부단히 애써야 합니다. 다윗이 블레셋 땅에 들어가지 않으려면 사울과 부딪히는 것을 각오하고 살아야 합니다. 언제 사울을 마주할지 모르는 불편함과 싸워야 하고 사울을 죽일 기회를 잡았을 때 그 유혹을 이기고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이지 않는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믿음과 치열한 기도와 인내가 필요한 작업입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은 단순히 죄를 절제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끊임없이 침투하는 죄악의 욕망과 매순간 싸우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 과정이 물론 힘들고 어렵습니다.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과 섞여 살다보면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그들과 경계가 희미해지고 나의 정체성이 이스라엘인지 블레셋인지 헷갈립니다. 어쩔 땐 이스라엘에서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블레셋으로 잠시 피했다가 이스라엘로 가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그런데 블레셋이 너무 편하고 좋습니다. 세상 속에서 죄 짓는 길은 너무나 편하고 좋습니다. 이 유혹과 끈질기게 싸워야 하는 것이 성도의 숙명입니다.
2- 하나님은 성도를 죄짓는 길로부터 건져내신다.
(전환문장) 만약에 온전히 우리 힘으로 죄와 싸워 이겨야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너무나 힘들고 피곤한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의지와 능력으로는 금방 지쳐서 나가떨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 짓는 길로부터 건져내십니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은 하나님은 성도를 죄 짓는 길로부터 건져내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블레셋이 모든 군대를 다 모아서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준비합니다. 2절에 보면 블레셋 사람들의 수령이 나옵니다. 이 수령은 블레셋의 왕을 의미합니다. 블레셋은 다섯 개의 도시가 한 국가를 이루는 형태입니다.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에글론, 가드 이 다섯도시에 각각 왕이 있습니다. 오늘 2절에 나오는 수령들은 이 다섯도시의 왕을 의미합니다. 이 다섯 도시의 왕들이 수 백, 수 천 규모의 군대를 끌고 진군하고 있습니다. 이때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가드 왕 아기스의 부대 뒤에서 따라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블레셋 군대 내에서 불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블레셋 네 도시의 대표들이 가드의 대표인 아기스에게 이의를 제기합니다. 3절에 보시면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이 이르되 이 히브리 사람들이 무엇을 하려느냐 하니”라고 합니다. 원문에 더 가까운 번역은 이 히브리 사람들이 무엇이냐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히브리 사람들이 왜 여깄냐는 말입니다. 히브리 사람이라는 말은 아바르라는 건너다라는 동사에서 기원했습니다. 홍해와 요단강을 건너온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고대의 텔엘 아마르나 서신이라는 문헌이 있는데 이것은 애굽의 아멘호텝 3세 4세가 가나안 지역의 속국들과 주고 받은 편지입니다. 고대 가나안 상황을 잘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문헌인데, 이 편지에 보면 히브리라는 민족의 이름과 비슷한 공동체가 나옵니다. 하비루라는 사람들입니다. 이 하비루는 당시에 도망친 노예들 범죄자들 사회부적응자들을 뜻합니다. 학술적으로 아마르나 서신에 등장한 하비루와 히브리인이 같은 말인가 하는 논쟁이 있었는데 결국은 별 상관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블레셋 사람들에게는 당시 사회로부터 인정 받지 못한 하비루나 히브리인이나 별 다를 것 없는 존재였을 것입니다. 하비루, 히브리 발음도 비슷합니다. 이스라엘 주변의 이방인들은 히브리라는 말을 쓸 때 사회부적응자 하비루와 같은 의미로 사용했을 것입니다. 물을 건너서 왔다는 히브리 라는 말 자체가 원래 그들을 무시하는 말인데 하비루와 동급으로 히브리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무시하는 멸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다윗과 그 무리를 정식명칭인 이스라엘이라 하지 않고 히브리인이라는 멸칭으로 부르면서 그들이 여기에 왜 있는지 이의를 제기합니다. 가드 왕 아기스는 이런 불만에 대해서 답변합니다. 이 사람은 이스라엘의 신하인 다윗인데 나와 함께 있은지 여러 날 여러 해다. 그런데 오늘까지 허물을 보지 못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여러 해는 아닙니다. 어느 번역 성경은 한두해로 번역을 합니다. 여러 날 한 두해 정도 있어 봤는데 괜찮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4절에 블레셋의 다섯 국가의 대표들은 이 말을 듣고 화를 냅니다. 4절에 보시면 다윗이 전쟁을 하다가 갑자기 그의 대적이 될 수 있으니 돌려보내라고 이야기 합니다. 갑자기 전쟁터에서 돌변해서 블레셋 군대를 쳐서 다시 사울 밑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하느냐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5절에 보시면 어떤 노래를 인용합니다. 다윗이 이전에 사울 밑에 있을 때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나서 이스라엘의 여자들이 부른 노래의 일부입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사울이 이 노래를 들었을 땐 질투를 했지만 블레셋 사람들의 입장에선 이 노래가 두려움입니다. 다윗이 죽인 블레셋 사람의 숫자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런 다윗과 함께 전쟁을 치를 수 없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6절에 아기스는 다윗을 불러서 이런 상황을 설명합니다. 블레셋의 수령들 그러니까 블레셋 다섯 도시의 왕들이 다윗의 참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이 전쟁에 참여할 수 없다고 이야기 합니다. 8절에 다윗은 태연하게 연기를 합니다. 아마 다윗이 이스라엘을 쳐야 하는 상황이 많이 곤란했을텐데 자연스럽게 일이 해결되었고 다윗은 마치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쉬운 것처럼 이야기 합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 이스르엘로 올라가고 다윗은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시글락으로 가게 됩니다. 마치 블레셋은 자신들이 선택했던 죄의 길을 계속 걸어가고 하나님이 선택했던 하나님의 백성 다윗은 이스라엘을 치는 죄의 길에서 돌이킨 것처럼 보입니다.
본문에서 주목할 부분이 있는데 블레셋 사람들이 다윗의 참전을 거절한 것이 과연 우연인가 하는 것입니다. 다윗과 그가 이끌고 있는 부대는 나발을 치러 갔을 때의 기준으로 약 육백명정도 됩니다. 그런데 블레셋 군대는 한 도시당 수백 수천 정도 됩니다. 천 명씩 왔다고 쳐도 다섯도시니까 오천명은 넘습니다. 다윗은 육백명입니다. 전체 군사 규모의 10%정도 됩니다. 다윗이 제정신이라면 열 배 가까운 수의 군대가 둘러싸여 있는데 거기에서 갑자기 블레셋을 치겠습니까? 물론 갑자기 기습을 하고 하면 적지 않은 혼란을 줄 수 있겠지만 다윗과 그의 군대는 반드시 몰살을 당합니다. 그리고 다윗이 사울의 미움을 받고 있다는 것은 당시 블레셋에까지 그 이야기가 퍼졌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다윗이 열배가 넘는 군대를 치고 사울 밑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지나친 걱정입니다. 다윗이 아무리 뛰어난 무장이라고 해도 상식적으로 생각하기에 불가능한 일 아닙니까? 그런데 블레셋의 다섯 대표들은 이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 가운데 이런 불안한 마음을 심어주셨고 다윗이 같은 민족인 이스라엘을 치는 죄악을 피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나중에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데 자신의 신분을 반역자로 위장해서 이스라엘과 전쟁하는 시늉이라도 내면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메시아의 계보를 세우기로 하셨습니다. 다윗을 후손을 통해 세상을 구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그 구원의 길을 견고하게 지키기 위해서 이스라엘과 싸우는 죄 짓는 길로 다윗을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구원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적용)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갈 때 죄를 짓고 편하게 지내느냐 아니면 죄를 짓지 않고 불편하게 이상한 사람이 되어 살겠느냐 하는 기로에 설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나도 세상 사람들처럼 편하게 적당히 속이며 화낼 때 화내며 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혹은 이렇게 살지 않으면 직장 공동체에서 내가 버틸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죄에 물들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믿어야 합니다. 어떤 마음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 짓는 길로 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다윗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신 것처럼 우리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복음의 사역을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결코 죄의 길에 빠질 수 없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 짓는 것을 피하기 위해 부단히 애쓰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 짓는 길로부터 벗어나게 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때론 우리가 너무나 연약해서 죄 짓는 길로 빠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생길 때 우리는 우리가 죄 짓기를 원하지 않는 그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여 기도하며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세상 가운데 죄의 유혹을 피하며 죄 짓는 길로부터 벗어날지 지혜를 구하고 기도를 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일꾼으로 나를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결론
설교를 맺겠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우리는 죄에 쉽게 물드는 연약한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하루도 이 교훈을 기억하며 죄 짓지 않도록 부단히 힘쓰는 가운데 나를 죄에 길에서 벗어나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지혜를 구하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