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9장

새벽기도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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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 선수

올해에 7-8월에 파리 올림픽이 있었죠? 뭐 개막식에 우리 나라를 북한으로 부른 것 부터 해서 아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올림픽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선수들이 올림픽에 참가해서 메달도 따고 하는 모습을 보면, 참 멋지다, 대견하다라는 생각도 막 들고, 같은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럽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한 선수 선수마다 짧게는 몇 초, 길어봐야 몇 분되는 그 짧은 순간을 위해서, 4년간 자신의 몸을 혹사하다시피 연습을 해야합니다. 친구 만나서 노는 시간, 먹고 싶은걸 맘껏 먹고 싶은 욕심 등을 희생하고, 과연 내가 올림픽에 나가서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중압감 등등 많은 것들을 희생하고 감내해야지만 남들보다도 더 뛰어난 자신만의 분야를 개척해서 메달을 쟁취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의 권리

오늘 본문말씀의 바울은 바로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처럼,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신이 희생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분쟁의 이유

먼저 3절 말씀을 보시면,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걸 보면, 고린도 교회 내부에서 바울을 비판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저희가 고린도전서를 보면, 1장 12절에도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사람들이 있어서 고린도 교회에 분쟁이 있다는 것을 이제는 다들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건 그냥 단순히 교회 내부에서 서로 응어리 진게 있어서, 아니면 단순히 서로가 맘에 안들어서 생긴 분쟁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이번주 월요일에 6장을 가지고 말씀을 전할 때, 말씀 드렸었죠. 세상 법정에 송사하는 일은 돈과 권력으로 찍어 누르는 일이라는 것 말입니다. 돈 그리고 권력으로 누군가에게 압박을 주기 위해서는 먼저 빈부의 격차가 극심하다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있는 고린도는 로마 제국 내에서 가장 문화적으로 다양한 도시들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적인 정서가 혼합되고, 또한 상업 중심지로서 굉장히 발달된 도시기도 했는데요. 고대에서 이렇게 상업적으로 발달된 도시에서는 한가지 특징이 바로 빈부격차입니다. 왜냐하면, 누군가는 극심한 노동을 해서 일을 하고, 그리고 그 노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임금을 주는 사람들은 딱히 큰 노동을 하지 않아도 명령을 내려서 시키기만 하면 알아서 돈이 굴러 들어오는 구조가 형성되기 때문에 노동을 통해서 벌이를 하는 사람들은 부유해질 수 없고,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을 싫어하는 이유

그런데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도착했을 때 그의 모습은 노동자였습니다. 사도행전 18장 1절에서 3절에는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서는 천막을 만드는 일을 같이 했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즉,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바울은 노동자고, 종의 형태를 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고린도 교회 내부에서도 같은 노동자 계층의 사람들은 바울을 좋아하는데, 돈 많은 이들은 바울을 그닥 곱게 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아니 저렇게 일하는 사람이 무슨 우리들의 사도가 된다는 거야?”하면서 의문을 품는 자들도 더러 있었겠지요. 그런 사람들은 아마도 아볼로 같이, 사도행전 18 장 24절에 나온 것처럼,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사람을 더 좋아했을 것입니다. 원래 그 당시에 부유한 사람들이 말 잘하는 철학자들을 식사자리에 초대해서 강론을 들었던 것처럼요.

바울이 원래 가진 권리

그러니 바울은 자신이 원래 사도로서 가지고 있는 권리를 이야기합니다. 1절말씀을 보시면,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라고 이야기합니다. 바울은 다들 아시다시피 로마 시민입니다. 세속적으로 보면 바울은 원래 “종”이 아닙니다.
또 2절을 보시면 바울이 “내가 딴 사람이면 몰라도 너희한테는 사도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바울이 예수님을 직접 만나뵈었던 것도 있지만,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교회가 세워졌기 때문에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 사도의 권리를 가졌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럼 대체 그 사도의 권리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아까 제가 부유한 사람들이 철학자를 자신의 집으로 불러서 대접했었다는 이야기를 했었죠. 바로 그 처럼 당시의 학자들은 저녁 식사 강연에 초대받거나, 강습료를 받거나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유명한 학자들은 굳이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살기에 충분한 돈이 있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초청 받는 식사자리를 통해서 생계를 유지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4절과 6절에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나와 바나바가 일하지 않을 권리가 정말 없겠느냐?”라고 바울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반문합니다. 11절에도 보시면,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이죠. 이것을 뿌렸는데 그 뿌린 만큼 수업료, 혹은 식사를 얻어 먹을 권리가 과연 없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만큼 사도로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치는 강사로서 바울은 사실 고린도 교회의 부유한 사람들에게 돈도 밥도 얻어먹을 수 있는 권리가 있고, 이게 그 당시에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또 이건 단순히 세속적인 철학자나 강사들의 것 뿐만 아니라 모세의 율법에도 기록된 것을 이야기하면서 유대인들의 비판도 반박을 합니다 신명기 25장 4절 말씀을 인용하는데요,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라고 하는 이 말씀을 통해 바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마치 곡식을 털어내는 일하는 소에게 그 떨어진 것을 먹지 못하게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신들에게도 그 소산을 받아 먹을 권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지요.

바울이 포기한 것

그런데 바울은 이것을 다 포기했습니다. 자신의 생계를 위해서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천막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마치 극심한 노동을 하는 종처럼 했습니다. 아마 고린도 교회의 부유한 사람들이 봤으면 아주 싫어했을 만한 모습으로 말이죠. 그것은 바울이 진짜 세속적으로도 종이어서가 아니라 바울이 직접 그렇게 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19절을 보시면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럼 바울은 왜 그렇게 했을까요? 아니 남들도 다 받아먹고 산다는데 왜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12절에 보시면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모든 것은 복음을 위해

어제 담임목사님께서 8장을 통해서 전하신 말씀 중에 실족하지 않게 하는 일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그것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바울이 지식이 많아서 그 지식으로 찍어 누르면 똑똑한 사람으로 남을 수는 있지만, 어리석은 이들에게 그것은 실족하게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바울이 수업료를 잔뜩 받아서 사도의 권리를 행사하면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좋은 선생님 정도로 남을 수 있겠지만, 돈 없는 이들에게 그것은 실족하게 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실족하게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사도의 권리를 포기한 이유는 19절 말씀처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20절부터 22절 말씀을 보면 이것이 더 두드러집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비록 바울이 율법에 속하지 않은 자유로운 사람이지만 마치 율법에 속한 사람처럼 행동하고, 이방인들에게는 비록 바울 스스로가 유대인이자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율법에 속해있지만 율법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부유한 자들에게는 못난 사람처럼 보일지라도 스스로 약한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약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

여러분, 우리도 이와같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마치 운동선수가 자신을 희생해서 승리를 얻고자 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에게서 내려놓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기부를 많이 해라, 거리로 나가서 전도를 많이해라 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데에 지혜롭게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 한반도에 선교사들이 처음 들어왔을 때, 그냥 대뜸 “예수님 믿으세요”를 외치지는 않았습니다. 미국에서 아주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는 선교사들이 왕과 귀족이 있는 조선에 들어와서 복음을 전할 때에 병든 자들을 치유하기 위한 병원을 세우고, 가난해서 배우지 못한 이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 받은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양반, 쌍놈이 없다고 하면서 신분제를 철폐했던 일들을 기억해보십시오.
마치 바울이 로마 시민이자 존경을 두루 받는 가말리엘의 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종된 자로서 복음을 전했던 바울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우리 주변에 복음이 필요한 이들에게 그들과 동행하며 나아갈 수 있어야합니다.

결론

제가 이주혜 전도사님과 결혼식을 올릴 때, 오셨던 분들은 아시겠지만, 제 밴드 친구들과 함께 축가를 불렀는데요. 그 친구들은 교회, 예수 이야기만 나오면 아주 몸서리를 치고 싫어하는, 소위 교회와 아무 접점도 없고 오히려 세상에 나오는 뉴스만 보고 교회를 아주 싫어하는 청년들이었습니다. 처음 밴드를 결성할 때만 해도 제가 전도사인 것을 밝혔을 때, 저를 이상한 사람보듯이 봤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제가 이 친구들과 함께 밴드 합주도 하고 공연도 하고, 때로는 바보같이 굴기도 하고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면서 친해지니까, 나중에는 이 녀석들이 자기들한테 힘든 일이 생기면, 딴 사람한테나 하지 꼭 저한테 전화를 걸면서 힘든 일을 토로하고, 또 저한테 의지를 많이 해주고 있는데요. 아직 믿음은 없지만, 한번은 그중에 한 친구가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있다면 나한테 수고했다고 꼭 안아주고 토닥여주실 것 같아”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특히 그 친구는 밴드 합주하러 가는 길에 전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막 욕을 하던 친구였는데, 저한테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 대문입니다. 또, 그 교회만 보면 얼굴을 찡그리던 친구들이 결혼식에 참석한답시고 교회 나와서 예배에 참석하는 모습을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과 구별된 모습으로,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유지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세상 가운데 복음을 전하러 나아갈 때에는 “나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야”하면서 마치 고고한 사람처럼 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많은 이들과 친구가 되어야하는구나 하고 말입니다.
이것을 무슨 세상과 타협을 해야한다는 말로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저희는 경건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지만, 또한 죄인되었던 이들과 친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처럼, 아직도 세상에 죄인된 자들과 친구가 되어서 세상 가운데 복음을 전하며 나아갈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입니다. 빌립보서 2:6-8 말씀을 보시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라고 말슴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더러운 종에 불과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죄인들과 친구가 되시고, 또 그들을 제자로 삼아 세상 가운데 복음을 전하셨던 것처럼, 바울이 비록 로마 시민권자이고, 명망 있는 선생에게서 교육을 받았고, 또한 사도였지만 유대인들과 이방인들과 약한 자들을 섬기기 위해 스스로 종의 형태를 취했던 것처럼, 세상 가운데 복음을 전하러 나아갈 때에는 저희가 세상의 많은 이들과 친구가 될 수 있어야합니다.
그렇게 사도의 권리를 가졌지만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과 약한 자들과 동행하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바울처럼,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죄인된 우리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세상 가운데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지만 또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상의 많은 이들과 친구가 되어, 더욱더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힘쓰며 나아가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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