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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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
방언
제가 2016년도에 저희 아버지께서 담임하시는 제천제일교회에서 중고등부 간사로 섬긴 적이 있습니다. 참 감사하게도 아이들을 담당하면서 많은 훈련이 되었었는데요, 한번은 겨울성경학교를 올네이션스 경배와 찬양 학교라고 하는 캠프로 가서 3박 4일 동안 정말 뜨겁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며, 말씀을 듣는 곳에 가서 아이들에게 정말 예배와 신앙을 다시 회복하는 역사를 일으키자! 해서 갔습니다. 참 쉽지 않은 곳이기도 했습니다. 평생 새벽기도라고는 해본 적도 없는 아이들을 데려가서 새벽 4시반에 기상해서 저녁 10시까지 찬양하는 집회를 시켰으니 저도 쉽지 않았지만 아이들도 쉽지 않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아이들은 그 자리에서 처음 방언기도를 하기도 하고, 주일 예배 때는 부모님이 시켜서 억지로 교회나와서 뻘줌하게 뒤에 앉아서 있던 아이들이 찬양하고 기도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막 수백명이 함께 찬양하고 방언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니까 저도 막 가슴이 뜨거워져서 열심히 찬양하고 기도하기도 했는데요. 그런데 모든 아이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면 참 좋겠지만, 다 그런 아이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저한테 조용히 와서, “간사님, 이거 사이비 아니에요?” 라고 이야기하면서 사람들이 막 “렐렐렐레”기도하는게 너무 무섭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저는 그때, 처음으로 이 방언기도라고 하는 것이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무서운 것일 수도 있구나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희야 당연히 뜨겁게 기도하고 하다보면 방언으로 기도할 수도 있고, 그것이 정말 하나님과 더 깊이 교제하는데 도움도 되고, 무엇보다도 더 오래 기도할 수 있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그 뜻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무슨 무서운 사이비 광신도 집단처럼 보일 수도 있구나 하고 말이죠.
방언보다 예언?
방언보다 예언?
오늘 말씀인 고린도전서 14장은 바로 사도 바울이 그러한 우려를 내비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2절부터 4절까지 쭈욱 보시면 방언은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고, 예언하는 것은 사람에게 하기 때문에 교회의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서로 위로하는 것이기 때문에 방언은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운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막 방언이 나쁘다, 예언만 좋은 은사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5절에 보시면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지만, 특별히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에 큰 도움이 되는 예언을 했으면 좋겠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7절에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하는데요, 만약에 여러분 악기를 연주하는데, 도레미파솔라시도~ 이렇게 음계를 나눠서 악기를 연주를 안하고 그냥 뿌우~~ 하고 한음만 연주하면 무슨 노래를 부르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또 8절에 보시면 옛날에는 전쟁에 나갈때 나팔을 가지고 나가서 진격해라! 아니면 퇴각해라! 하고 말로 안하고 나팔을 불었는데, 그걸 똑바로 안하면 병사들은 뭐 어떻게 하라는 거야? 하면서 혼란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8절과 19절 말씀을 보시면 방언을 말할 줄 아는 것을 참 하나님께 감사하지만, 교회에서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고 대화를 나눌 때에는 남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하는 것이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기 때문에 더 낫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사를 지혜롭게
하나님의 은사를 지혜롭게
여러분 사실 바울이 방언과 예언을 가지고 예를 들어서 그렇지, 사실 모든 것에 있어서 바울은 지혜롭게 하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전에 고린도전서의 9장 말씀을 전해드리면서, 복음을 전할 때 그냥 막 전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롭게, 즉 유대인들한테는 유대인처럼, 이방인들한테는 이방인처럼, 약한 사람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다가가서 그들과 친구가 되어서 복음을 전하자고 한 바울의 권면을 말씀드렸는데요. 이 방언과 예언은 결국에 저희가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듣고 하는 일에 있어서 지혜롭게 하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4장의 20절 말씀을 보시면 지혜에 있어서는 아이처럼 하지 말고 장성한 사람의 지혜처럼,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조금 아픈 과거가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게임만 하게 되기 전에, 저는 원래 굉장히 밖에 나가는 것도 좋아하고 아버지가 낚시하는거 좋아하셔서 같이 낚시하는거 따라가기도 하고, 교회에서 친했던 친구들이랑 같이 교회 근처에 있던 아차산에 올라가서 뛰어놀기도 하고 그랬습니다만, 초등학교 2학년 쯤이었을까요? 하루는 밤에 혼자 교회를 가는데 중학생 처럼 보이는 남학생 두 명이 저랑 마주 길을 걸으며 지나치려다가 아무 이유없이 그냥 제 얼굴에 침을 딱 뱉는 겁니다. 저는 너무 놀라기도 하고 기분이 더럽기도 해서, 얼굴을 막 닦고 한번 휙 째려본 다음에 제 갈길을 가려고 발걸음을 돌렸는데, 뒤에서 저를 발로 뻥 차고서는 막 웃으면서 걸어가버리더라는 겁니다.
그때 길바닥에 엎드려서는 아주 펑펑 울면서 있었는데, 제 마음에 조금 큰 상처로 남은 것이 주변에 어른들이 그렇게 많았는데 도와주는 사람이 한명도 없는거예요. 그래서 그때부터 밖에 나가는 것이 좀 많이 무서워졌습니다. 한동안은 부모님 몰래 편지봉투 뜯는 칼을 가슴에 품고 다니면서 누가 날 해칠지도 몰라 하면서 내 몸은 내가 지켜야지 하고 다니기도 하고, 점점 밖에 나가는 시간보다는 집안에 틀어박히는 시간이 늘었습니다. 특히 학교에 다녀오면 곧장 제 방 안에만 틀어박혀서 컴퓨터를 하거나 책을 읽거나하는 시간이 훨씬 많았습니다.
근데 집에서 게임만 하면 질려요. 그래서 하루는 악기를 연주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조금 크고 나서는 제가 직접 게임을 만들어보기도 했고, 하루는 음악을 만들어보기도 하면서 제 방안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은 모두 다 해보게 된 것입니다. 지금 제가 방송실에서 뭔가를 만지고, 컴퓨터를 잘하고, 음악을 하게 된 데에는 그런 과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그냥 제가 재밌어서 하게된 것이었거든요. 컴퓨터를 하고 음악을 하고 있으면 스스로에게 위로가 되고 마음이 안정이 되고, 또 밖에 나가기는 무서우니까 저를 위해서 그렇게 해왔었습니다마는.
제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교회를 섬기게 되니까 이것이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이 되고 있었습니다. 고등학생 때, 제천제일교회에서 방송실에 들어가서 주일 예배 자막이랑 카메라 조작을 제가 하기도 했구요, 교회 컴퓨터에 무슨 문제가 생겨서 막 중요한 문서들이 날아가게 생길때는 목사님들이고 장로님들이고 제가 학생때부터 부르셔서 제가 달려가서 고치기도 하고 했습니다. 간사로 전도사로 섬기고 부터는 찬양 인도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돌아보니, 제가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아서 방구석에 틀어박혔던 그 시간이 오히려 감사하게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연약한 모습 조차도 크게 쓰시려고 준비하셨구나, 교회에서 필요한 부분에 날 쓰시려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준비하시는 구나 하고 너무나 감사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그냥 저 혼자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고 방구석에서 깨작대던 그런 일들이 교회에서 쓰여질 때에 참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신비를 체험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처럼, 바울이 오늘 고린도전서의 14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26절 말씀을 보시면 찬송시도 있고 말씀도 있고 계시도 있고 방언도 있고 통역하는 은사들도 있는데, 이 모든 것을 다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저희가 각각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1대1로 만나면서 깊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혼자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나만 하나님 열심히 믿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또한 교회 밖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본이 되고 덕을 세우는 일에 지혜롭게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누리자고 하는 것입니다.
27절부터 30절까지 차례를 지키면서 방언하고 예언하라고 하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음악 좋아한다고 악기 연주 좋아한다고 예배때 악기로 찬양으로 섬겨주시는 분들한테 다 비키라고 나 혼자 잘났으니까 그 악기 내가 다 할거라고 하면 그건 전혀 은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31절에 다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다고 하는 말씀처럼, 모두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가 있기 때문에 함께 힘써서 섬기며 33절의 말씀처럼 무질서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화평의 하나님이신 것 같이 화평하게 함께 나아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아니 근데 화평하게 하고 지혜롭게 하고 질서있게 하자면서 34절에 갑자기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이래버리면, 은혜가 안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근데 여러분 이거는 당시의 유대교의 여성의 지위 뿐만 아니라 문화를 함께 살펴봐야합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유대교 수업을 들으면서 뉴욕의 브루클린이라고 하는 도시에 가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어요. 거기에 가보시면 유대교의 극정통파, 즉 근본주의적이고 폐쇄적으로 자기들만의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토라, 즉 율법을 딱딱 지키면서 살아가는 유대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특징 중 하나가 율법, 즉 성경은 남자만 공부할 수 있고, 여성들은 세속적인것, 즉 돈버는 일만 할 수 있습니다. 바울 당시 때도 똑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여성들이 회당에서 같이 율법 강론을 들을 수는 있었지만 대체로 율법 공부는 남자들만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여자들은 배울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회당에서 강론할 때에 손을 들고 질문하는 것은 문제가 없었지만, 잘 모르는 사람이 질문하는 것은 무례하게 여겨졌습니다. 안그래도 분쟁이 있던 고린도교회였는데 더 큰 분쟁이 일어나는 것을 바울은 아무래도 꺼리게 되었겠죠. 그렇지만 바울은 당대로선는 생각할 수도 없는 여성의 교육권을 무시하지는 않았습니다. 35절에 무엇을 배우려면 남편에게 물어보라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남편이 잘 가르치라는 겁니다. 배울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교회에서 잘 모르고 질문하면 창피를 당하니까 오히려 집에서 잘 배우라고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러니까 36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라고 묻는 것은 남자한테만 주어진 것도 아니고, 여자한테만 주어진 것도 아니고, 방언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도 아니고, 예언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화목하고 화평한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잘 모르는 사람이 있으면 잘 가르쳐주고, 힘든 일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도와주자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40절에 말씀처럼 모든 것을 품위 있게, 질서 있게, 또 덕을 세우게끔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어제 저희가 사랑장으로 유명한 말씀인 13장을 보았는데요, 이 또한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를 위해서 필요한 일입니다. 나 하나만 잘먹고 잘살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을 권면하고 위로하고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함께 성장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야합니다.
그렇게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로서, 힘든 일이 있으면 서로 돕고 의지하며, 또한 지혜롭게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가지고 화목한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