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후서 3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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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497장, 496장,
오늘이 데살로니가 후서 마지막 시간입니다. 개인적으로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성경 통독을 할때 데살로니가 전후서가 장도 많이 않고, 절도 짧기 때문에 쉽게 읽힙니다. 그래서 좋아하는 부분인데 성경을 읽다보면 이렇게 전서랑 후서로 나뉘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보면 로마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이렇게 있는 서신서들도 있지만 데살로니가 후서 처럼 전서와 후서로 나뉜 서신서들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전서와 후서를 굳이 남겼냐하면 지금 저희가 읽고 있는 이 성경은 당시에 편지였습니다. 그 당시에 편지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었어요. 지금 처럼 빠르게 소식을 접할 수 없던 시절도 아니었고, 박해를 받으며 복음을 전하는 시기여서 사도들이 5년 10년 이렇게 있을 수 없었던 때에 가르침을 주는 편지는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편지 하나를 받기 위해서 사람의 손을 거쳤어야 했고, 그 편지의 내용에 따라서 그 교회가 다른 거짓 선지자들과 환란과 고난, 교회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지가 갈렸기 때문에 사도들이 교회로 보내는 편지는 굉장히 소중하고 중요한 문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사도들의 이름을 빙자해서 보내지는 일들도 있었고, 편지를 혼자 보는 것이 아니랄 교회 공동체가 함께 나눠보는 회람서신 등 당시에 이 편지가 가지고 있는 중요성이 있습니다.
그렇게 교회로 편지를 보내고 나니까 그 교회에 꼭 필요한 내용들이 빠진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보내는데 이 공동체에 필요한 내용이 빠진 내용이 있어서 다시 내용을 보충하기 위해서 편지를 보내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두번째로 첫번째 편지를 보내고 난 이후에 그 공동체의 문제가 잘 해결이 되지 않은 경우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서를 보내고 난 이후에 교회에 새로운 이슈들, 문제들이 생겨나서 그것들을 다뤄야 할 필요성이 있어서 두번째 편지를 보내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가 이 두번째에 해당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를 보냈는데 재림에 대한 교회안에서의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없었던 문제들이 생겨났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문제였냐면 이미 재림이 왔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저희가 보았듯이 이교회는 사도바울이 아주 짧게 복음을 전한 곳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보다 열정적인 믿음이 있었던 교회였어요. 그래서 환란과 고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믿음으로 잘 이겨내고 있는 모범이되는 교회였죠. 그런데 여러 고난을 당하는 와중에 어떤 이들이 영으로, 또는 말로, 또는 편지로 이미 재림이 왔다고 말하는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소란스러웠지기 시작했어요.
살후2:2 데살로니가 전서도 고난과 환란을 당했는데 그 이후에도 환란과 고난은 여전했습니다. 아마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속에서 “내가 영으로 보고, 또 말로도 듣고, 또 누가 편지를 했는데 벌써 주의 날(재림)이 왔데!”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였냐하면, 이제 이렇게 힘든 고생하고 있으니까 이제 재림이 진짜 왔나보다. 이제 재림이 왔으니/ 예수님이 다시 오셨으니 행복한 날만 있을거라고 생각했어요. 고생 끝! 행복 시작!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았겠어요? 이런 잘못된 가짜 복음으로 교회가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그래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혼란스러워 하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해서 다시 편지를 쓴 것이 바로 데살로니가 후서의 말씀입니다. 후서에서는 재림이 아직 안왔다는 내용을 사도 바울이 논리적으로 1,2장에서 설명합니다.
게으름을 경계하다.
게으름을 경계하다.
그리고 오늘 3장의 말씀입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재림에 대한 오해가 있었다보니, 이제 힘든 환란과 과난이 끝나고 예수님이 오시는 재림이니까 이제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일하고 있던 것도 이젠 재림이 왔으니까 아무소용이 없으니 직장도 그만두고, 하던 일도 그만두는 일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사회적 책임이나 가정에 대해서 무책임한 모습들을 보여줍니다. 굉장히 도가 지나친 수준에 굉장히 이른 종말론적 기대를 사도바울이 잠재우고자 전서와는 다르게 아주 강한 어조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이야기합니다.
3장에서 이런 문제점들을 다루는데 6절을 보시면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사도바울이 그냥 게으름을 경계해라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앞 쪽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라고 굉장히 강경하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강한 어조로 이야기하는 것인데, 데살로니가 전서에서는 권면하는 듯한 이야기로 이야기했다면 이제는 직설적으로 말합니다. 사도바울의 이름도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서 떠나라고 강력하게 말합니다.
저희도 마찬가지 입니다. 명하노니 떠나라 라고 말하는 것 처럼 아닌 것에는 단호하게 대처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7절에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우리를 본받아야 할거라고 이야기하면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했다고 설명합니다. 지금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때 이른 재림으로 그들의 삶이 무질서해졌습니다. 그 것이 게으름이라는 모습으로 나왔는데 당시에 노동을 좀 천하게 여기는 그리스, 로마의 사회적인 분위기와 고위 귀족 후원자들에게 의존해서 후원자들이 주는 것으로만 살아가는 사회적인 모습 등 교회 안에서, 사회 속에서도 무질서하게 살아가는 것을 사도바울이 경계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우리를 본받아야 할거라고 설명하는데, 그동안 데살로니가에서 행한 모습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8절에 그 모습인데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쉽게 음식을 먹은 것이 아니라, 수고하고 애쓰며 주야로 일하면서- 이게 무슨 말이겠어요. 낮에는 복음을 전하고 아침 저녁으로는 일하면서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게 열심히 살았다는 걸 설명합니다.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어렵지만 노동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10절을 말합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라는 말씀을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일이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경작하다 노동하다의 의미를 가진 희브리어 아바드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바드는 경작하다, 노동하다라는 일하는 것을 설명하는데, 그 의미외에도 이 아바드는 예배하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경작하고 노동하는 것은 예배하는 것과 같은 의미라는 것입니다. 땀흘려 수고하고 애써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결혼하고 나니 생활이 180도로 달라지지는 않지만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새로워진 것이 남편이 있다는 거였어요. 그전까지는 제 삶에 남편이라는 존재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제 삶에 챙겨야하는 남편이 생긴어에요. 집에서 교회에서 함께 손발을 맞추고 힘들면 그냥 두고, 아프면 아픈가보다 두는 것이 아니라 내 몸같이 사랑하고 챙겨야 하는 남편이 있다는게 가장 큰 변화입니다. 그래서 남편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고, 좋은 환경을 제공해주고 싶고, 잘 먹이고 싶고, 잘 입히고 싶어하는 모든걸 도와자는 건 또 다른 노동이었습니다. 한달은 신나서 했지만 그 이후에는 이게 왜 집안’일’이라고 불리는지 알겠더라구요.
제 손으로 세재를 사고 집을 꾸미고, 설거지는 하고 빨래는 하는 모든 것들이 남편과 함께 살게되면서 새롭게 시작했던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처럼 삶에 자리에서 설거지를 하고 빨래는 하며 때로는 자녀를 양육하고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노동의 모든 것들이 예배입니다.
바울이 기도 밑음 말씀에 대해서 말하다가 게으르게 행하는 것과 무질서하게 행하는 것, 즉 일하는 것에 관해 말한 것은 영적인 것과 노동하는 일상의 삶이 별개가 아님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를 잘 드리는 성도는 세상에서도 일을 잘하는 일꾼입니다. 예전에는 교회에서 예배 잘드리고 성경말씀 잘 보고 살아가면 예배를 잘 드리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영적인 것만 찾는 다고 일상에서 내가 책임져야하고 일해야 하는 것을 소홀이 하게 된다면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정말 천국만 바라보고 이 세상의 것은 나쁜 것이고 그래서 소홀이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사도바울의 말처럼 무질서한 것이며 게으른 것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갈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지만 지금 이땅에서 하나님이 이루시는 천국을,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예배를 경험하는 저와 어려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평강을 말한다.
평강을 말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의 마지막에 평강을 이야기합니다. 16절 첫 마디가 평강의 주께서라고 시작합니다.
바울은 주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때마다 일마다 평강을 주실 것을 선언합니다. 여러 성경말씀에서 이렇게 끝 인사를 많이 하는데요. 이것은 단순히 끝인사로서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평강의 주시기 때문에 지금 때 이른 재림으로 환란을 겪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평강하라고 이야기해주는 것니다. 평강을 뜻하는 헬라어 “에이레네”는 결합하다 라는 단어 “에세로”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평강은 노력이나 행위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으로 누리는 완전한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셨을 때부터 하나님과 결환되어 있는 평강의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 범죄함으로 쫓겨난 뒤로 하나님과 결합됨이 깨져서 평강이 없는 상태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멀어짐으로 두려움 가운데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평강이 깨진 상태로 살았고 어떤 힘과 노력으로도 평강을 회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악을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막힌 담이 허물어지고 다시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평강을 이루신 예수님과 하나 될 때 우리에게 완전한 평강이 임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해서 이 평강을 선언했습니다.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 평강은 세상이 우리에게서 절대 빼앗을 수 없는 평강입니다. 이 평강가운데 있을 때 환란이나 고난이 와도 우리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면서 때 이른 종말론으로 혼란을 겪었던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영적인 것과 노동하는 일상이 별개가 아님을 강조 했던 것 처럼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아가고, 예수 그리스도와 온전히 하나되는 평강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오늘 데살로니가 전서를 보냈음에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여러 이슈들을 통해서 다시 편지는 보낸 데살로니가 후서 마지막 장을 함께 보았습니다.
잘못된 믿음으로 재림을 오해하여 무질서함 속에서 게으르게 행했던 이들처럼 저희가 주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하지만 잘못된 믿음으로 해석해서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때로는 앎에도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하지 않던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주님, 영적인 것과 노동하는 일상의 삶이 별개가 아닌 것 처럼,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며, 이전에도 오셨고 앞으로 오실 주님께 영광돌리며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옵소서.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함으로 누리는 평강을 온전히 누리기 원합니다. 예수님과 하나될 때 우리에게 완전한 평강이 임하는 것 처럼 오늘 기도하며 예배 하는 이 자리위에 주님 함께하셔서 저희가 온전한 평강을 누리며 오늘 하루를 살아갈 수 있도록 함께하여 주옵소서.
이 새벽의 자리에 가져온 기도의 제목들이 있습니다. 주님 들어주시고 역사하여주셔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시간되게 하시고, 특별히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며 우리 주위에 기도가 필요한 이들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시간되게 하옵소서.
이땅 가운데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