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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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찬송가 460, 454장
오늘 야고보서 2장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더 알아나가는 귀한시간 되길 소망합니다.
어제부터 저희가 야고보서를 보고 읽고 있는데 오늘은 그중에서 2장의 말씀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차별과 편견
차별과 편견
성경을 보면 제목들이 있는데 2장의 첫 제목을 보면 “차별을 경고함”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지금 초대교회 안에서 차별로 인한 문제가 생겨났어요. 그리고 1절 마지막에도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사람을 차별하고 있는거에요. 차별의 예를 드는데 2-4절의 말씀을 보면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만일 회당에서/예배하는 곳에서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부자가 들어오고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오는데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좋은 자리에 앉히고 가난한 자는 내 발등상 아래에 앉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얼마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을 믿는 모습과 먼 태도를 보이고 있느냐고 설명합니다.
이때 많은 성도들이 부유한 자들은 아니였어요. 그러면 가난한 자들을 더 잘 환영하고 믿음으로 인도하면 좋겠지만 오히려 믿는 자들이 빈부의 격차로 부당한 차별을 만들었고, 그당시 부자가 된 그리스도인들의 걷차림을 보고 우대하는 분위기를 형성했습니다. 그래서 6절에 보시면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너희가 오히려 가난한 자들을 없니여기고 있다(너희도 가난한데 가난한 자들을 업신 여기고 있다.) 그런데 너희들이 그렇게 대접하고자 하는 부자들은 오히려 너희를 억압하고 법정으로 끌고가지 않느냐~ 부자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말하기를 그 아름다운 이름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 그리도인이라는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차별이라는 단어가 원어로 보면 편견, 편파성이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사람을 대할 때 편견을 가지고 대하면 올바른 시선으로 사람을 볼 수 없는 것 처럼, 오늘 외적인 모습으로 예배드리는 곳에서도 이런 편견을 가지고 대하는 이들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문제는 초대교회 뿐만 아니라 지금 저희에게도 관련이 있는 문제지요.
성인 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친구들이 자리를 잡게 되니까 다양한 직업들을 알게 되었어요. 물론 무직인 친구도 있고, 알바하는 친구도 있지만 회사원이 된 친구들도 있고, 방송 PD가 된 친구도 있고, 3D모델링을 일러스트 디자이너, 의사 선생님 등 다양한 직업군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고가의 물건을 파는 명품 매장가면 응대해주는 직원으로 취직을 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제 취직을 했느데 그해 코로나가 터졌어요. 많은 사람들이 여행도 못가고 무언가를 할 수가 없는 상황에서 보복소비가 생겨나, 명품구매가 굉장히 증가했습니다. 주변에서는 어렵다고 하는데 이 친구는 오히려 일이 더 많아지고 더 바쁜 삶을 살았어요.
그런데 그때 명품매장에 직원 응대에 대한 여러 논란들이 있었어요. 명품매장에 갈 때 잘 차려입고 가면 응대 해주는 직원이 바로 붙어서 응대도 잘해주고 친절하며 여러상품들도 더 많이 보여주지만, 청바지에 슬리퍼 신는 추례한 모습으로가면 좀 더 불친절 하거나 응대를 잘 안해준다는 놀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 친구가 직원이 되니까 같은 직원들 끼리 물건을 살 것 같은 고객에게 더 잘 해주고, 그래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안가려고 하는걸 봤데요. 왜냐하면 많이 팔수록 실적이 되다보니 그런 모습들을 많이 보여주었다고 해요. 하지만 이 친구는 누가 오던 응대를 잘 해주었는데, 어느날 아주 평범하게 옷을 입은 한 아주머니가 오시더니 비싼 옷들을 이리저리 만저보며 옷이랑 가방을 보시더래요. 그런데 고가의 옷이다보니 옷을 막 이리저리 만지는 게 매장입장에서는 그렇게 좋은 행동은 아니라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그날도 그런가 보다 하면서 이 옷이 올해 가을시즌에 들어온 신상이고 이 가방이 어쩌구 저쩌구 이야기하면서 응대를 열심히 해드렸는데요. 그리고 아주머니가 다 보셔서 이게 가시나 보다 하고 웃으면서 인사하려고 할 때 그 아주머니가 “지금 내가 만진 것들 다 주세요.”라면서 그 많은 것들을 사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그 친구도 놀라고, 같은 매장의 직원들도 놀라면서, 사람이 보여지는게 다가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으로 응대하는 직원의 태도도 논란이 되고 좋은 행위라고 말할 수 없는 일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편견을 가지고 차별하는 것이 옳으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0절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아무리 10계명을 잘 지켜서 살인도 안하고, 간음도 안했어도 편견을 가지는 시선을 가지고 차별한다 율법 안에서 범법한 자가된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물이 맑아도 오염된 물 한방울만 들어가도 오염된 물이 되서 먹기 꺼려지는 것 처럼, 율법 한가지만 범해도 모든 율법을 어긴것과 같은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주님께서 율법아래 죄인 인 우리에게 율법에서 자유케하는 은혜를 주셨죠. 그 전까지 율법 아래에서 범법한 자였지만 자유의 법이/그리스도의 법이 우리를 구원했으니 너희도 용서받은 자가 되었다면 너희도 은혜와 사랑안에서 긍휼을 배푸는(용서는 배부는)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희도 죄 아래에서 자유할 수가 없습니다. 저희가 큰 죄를 범하지 않아도 오늘 차별하고 편견의 시선을 가지는 것도 같은 죄라고 야고보서는 이야기하는데, 그런 죄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긍휼이 여김을 받는 자가 되었다면, 저희도 용서받은 자 처럼 다른이들에게 말씀에 따라 말하고 행하는 믿음을 실천하는 자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음 것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음 것이다.
그래서 다음 14절부 나오는 말씀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 다음절부터 행함이 없는 믿음의 예를 들어주는데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도와달라는 사람이 왔는데 말만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거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아까 편견과 차별에 대한 예를 든 것과 같이 무관심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반대말이 무관심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일에 이렇게 무관심하냐라고 야고보서는 이야기합니다. 외면하는 이 일이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고 설명합니다.
2장에서 행함이 없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첫번째가 편견과 차별에 관한 말씀이었고, 두번째가 무관심한 외면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이렇게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과 라합
아브라함과 라합
그러면서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아브라함과 라합의 예를 들면서 믿음이 있는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여줍니다. 먼저 아브라함 이야기를 하는데 23절에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아브라함이 의롭다 여김을 받았냐면 21절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구약에 아브라함의 아들을 드리는데 어떤 표현을 썼냐면 너의 독자를 바치라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합니다. 저희 대부분 자녀를 두신 부모님이신데 자녀를 바치하는 말씀에 순종하기가 사실 굉장히 어렵잖아요. 저도 자녀는 아니지만 제 남편을 제단에 바치라고 하면 참 기적적으로 만나서 결혼해서 아직 얼마 살지도 않았는데 그런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을 먼저 의심했을 거에요. 그런데 그 말씀에 순종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됩니다.
그리고 라합의 이야기를 하는데 25절에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이스라엘 정탐꾼이 왔는데 라함이 하나님의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을 믿어 정탐꾼을 숨겨주고 도망갈 길을 열어주었던 행함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 비유하고 있는 이 두 사람은 참 다른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뿌리가 되는 사람이고 남자고 당시 족장이었는데, 라합은 이방인이고 여성이고 기생이었던 사람입니다.
서로 다른 것을 가진 사람들 이지만 이들의 공통점이 있는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고, 그 믿음을 행한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즉, 참 믿음은 행함이 있는 것이라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믿음과 행함은 함께 간다.
믿음과 행함은 함께 간다.
그런데 여기에서 의문이 드는 구절이 등장해요. 24절에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밈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게 아니라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저희가 계속 봐왔던 말씀을 보면, 특별히 사도바울이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에 행위에 있진 않고 믿음으로 된다고 했는데,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라는 이 말이 서로 반대되는 주장을 하는 것 처럼 보여집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잘 보면 서도 다른 상황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이방인을 향해 전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구원받는 다는 것은 우상숭배하는 것과 같이 제사를 드리고 신들을 기쁘게 하는 신전에서 행해지는 여러 행위가 아니고, 구원을 얻으려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유대교의 주장을 향해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야고보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 특별히 유대인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이미 믿음을 가직고 있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실천과 행함을 가볍게 여기고 믿는 구원을 교리적으로만 이해한 이들에게 구원 받은 자로서 삶과 행위가 믿지 않는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으면 어떤게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느냐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편견을 가지고 차별하는 점, 이웃의 어려움을 보고도 외면하는 모습을 2장을 통해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오직 믿음으로 얻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 그에 맞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구원을 얻었다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저희가 이번주 수요일에 말씀을 통해서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들었죠.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혹은 땡스기빙과 같은 추수감사절에만 나오고 일상의 삶에서 예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사는 사람이 과연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일 수 있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결론
결론
오늘 야고보서가 쓰여진 때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12사도 있고, 사도바울도있고, 야고보도 있었던 그런 시기입니다. 설마나 많은 제자들이 복음을 전했고, 그복음을 들은 이들이었지만/ 서로 차별하며 편견을 가지고 있었고, 믿는 이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무관심해서 외면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 일들은 지금 저희에게도 있죠. 구원받은 자로서 예수님을 믿는 다는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함이 나타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 기도하겠습니다. ]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예배의 자리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저희가 함께 모였습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을 통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음 믿음이라는 말씀을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저희가 주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으로 구원받은 자녀가 되었다면 이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서 편견을 가지고 차별하는 자가 아니라, 사랑 없이 무관심한 자가 아니라 온전한 사랑과 귱휼을 베풀며 나아가는 온전한 행함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옵소서.
사랑의 주님, 이 온전한 행함이 저희의 힘으로는 나올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말씀대로 살아내고 싶으나 때로 주저하고 저희의 생각과 마음대로 행할 때가 많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저희의 연약함을 용서하여 주시옵고, 용서할 수 없는 이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이를 사랑하는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부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움직이여 놀라운 역사를 이루내는 일들을 저희가 보게하옵소서.
은혜의 주님, 이제 설 명절이 다가옵니다. 오고가는 발걸음 주님께서 지켜주시고, 이번 설에는 더욱 주님의 사랑의 시선으로 대하며 주님의 거룩한 가정으로 튼튼히 서나가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오늘 가지고 나온 기도의 제목을 주님 들어 응답하여 주시고, 서로를 위해 중보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