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고통에 반응하는 사람

사무엘상 강해 시리즈   •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44 views
Notes
Transcript
서론
사무엘상 두 번째 설교입니다. 지난 번 한나라는 여인이 반복되고 해결 불가능한 고난을 겪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고난을 돌파하는 방법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한나가 이 기도제목을 갖고 나아갔을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1- 개인의 고통을 통해 시대의 고통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개인의 고통을 통해 시대의 고통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9절에서는 한나의 상황을 역전시키는 장면이 시작됩니다.
엘가나의 가족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납니다. 여기 이 일어난다는 단어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일어난다는 단어를 70인역이라는 고대 번역성경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일어난다고 그렇게 번역을 합니다. 우리가 인정하는 히브리어 원문에 있는 번역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 개역개정에 그 성경 번역이 들어오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신앙의 선배들이 이 본문을 어떻게 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나가 지금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은 일종의 믿음의 결단을 보여주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9절 하반절에 보면 엘리 제사장이 등장합니다. 아시는 것처럼 엘리는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고 뒤에 나오는 본문에서 유추해볼 때 사사의 역할을 감당하는 지도자입니다. 한나가 일어날 때 엘리 제사장은 앉아 있습니다. 엘리가 대제사장으로서 성막에 앉아있는 게 무슨 그렇게 특별한 일이겠습니까? 아니면 엘리가 그곳에 있었다라고 해도 되는데 굳이 앉아 있는 것을 왜 이야기했겠습니까? 이것은 한나가 자리에서 일어서 있는 장면과 대조를 이루기 위해 일부러 쓴 것입니다.
한나는 자신의 고통을 고통에서 끝내지 않고 어떤 신앙의 결단을 했습니다. 우리는 사무엘상의 내용을 잘 알기 때문에 엘리 개인의 고통이 무엇인줄 잘 압니다. 바로 그의 자녀들인 흡니와 비느하스가 불성실한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한나는 자녀를 낳지 못하는 문제를 두고 어떤 신앙적인 결단을 하며 일어서고 엘리 제사장은 자녀의 문제를 묻고 그냥 앉아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끝끝내 영적으로 일어서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는 결국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패전했다는 보고를 받고 앉아 있다가 뒤로 넘어가서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이사야서 60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외침을 알 수 있습니다.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59장까지 언약을 기억하라 구원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신앙의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개인의 고통을 통해 한나는 신앙의 결단을 했습니다. 일어났습니다. 엘리는 자신의 고통을 결단으로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한나는 이런 신앙의 결단을 하고 매년 반복되는 그녀의 고통을 끊고자 했습니다. 10절에 보면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한다고 말씀합니다. 마음이 괴롭다고 할 때 이 괴롭다는 뜻은 쓰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한나가 마음이 써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한다는 뜻입니다. 여기 쓰다는 말은 성도님들이 잘 아시는 것처럼 ‘마라’라는 히브리어입니다. 마라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저히 써서 못 마시는 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번에 살펴본 룻기에서 나오미는 그를 나오미라 하지 말고 ‘마라’라고 부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한나가 마음이 써서 기도했다는 표현을 통해 한나의 고통이 구원역사적인 것으로 발전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마라를 단물로 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녀를 잃어서 스스로를 마라라고 부르라했던 나오미가 이방 며느리를 통해 메시아의 계보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마라라는 쓴 물을 만났고 나오미는 자신의 이름을 마라라고 했고 한나는 그 마음이 마라가 되었습니다. 이제 이 한나의 마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놀라운 역사를 보여주실 것입니다.
믿음의 결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일어서서 자신의 마라를 내놓는 한나가 11절을 보면 이런 기도를 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한나의 기도를 유심히 보시면 이 기도가 단순히 자녀를 낳지 못해서 하는 기도와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다 불임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만군의 여호와라고 하면서 고통을 돌보시고 기억해주시고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불임을 치료해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특히 고통을 돌보신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백성이 외세에 억압을 당해서 구원을 요청할 때 쓰이는 표현입니다.
사무엘상 2장을 보시면 이런 사실이 틀리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2장에는 한나의 기도가 나오는데 이 기도는 임신을 해달라고 응답받은 내용이기 보다 메시아가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대적을 처단하는 내용에 훨씬 더 가깝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한나의 기도는 단순히 자녀를 달라는 것을 넘어서서 이스라엘을 영적인 도탄에서 건저 낼 인물을 보내달는 기도입니다.
맨 처음 한나의 고민은 개인적이었습니다. 자식이 없어서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결단을 하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했는데, 이 개인의 고통을 통해 민족의 고통을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정확히 이렇게 된 시점이 언제인지는 본문을 통해 알 수 없지만 확실히 한나의 기도제목은 개인의 고통에서 시대의 고통을 바라보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분명 처음에는 자녀가 없어서 브닌나에게 핍박받아서 그게 너무 힘들어서 기도했는데 자기 가정의 문제를 통해서, 그녀의 가정 뿐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 말씀을 떠나 영적으로 침체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녀에게만 다음 세대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에 하나님의 언약을 이을 후대가 없었습니다. 흡니와 비느하스만 봐도 알지 않습니까? 이걸 깨달으니까 한나의 기도가 바뀌었습니다. 그냥 내 문제만 해결해주는 하나님이 아닌 만군의 여호와를 불렀습니다. 문제 해결 이전에 근본적인 민족의 구원 문제를 놓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적용) 우리는 이 자리에 나의 개인의 문제를 가지고 나와 하나님께 해결을 요청합니다. 이것이 절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저도 개인의 문제를 하나님께 요청해서 응답받고 감사한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는 개인적인 문제를 통해 공동체의 기도제목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한나의 기도가 바뀐 것처럼 우리의 기도제목을 바꾸십니다. 나의 믿음을 성장시키시는 것처럼 나의 기도제목도 성장시키십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은 한나가 자리에 일어서듯이 결단을 해서 이 자리에 오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우리의 기도제목을 더 성장시켜야 합니다. 우리 기도제목이 성장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내가 직장에서 인간관계에서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놓고 기도하다보니 그 직장의 구조적인 부분을 놓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가 힘들어하는 사람의 주변을 둘러싼 모든 환경을 놓고 중보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 우리 기도의 모습은 도깨비 방망이의 모습이었지만 매일 조금씩 성장해온 우리 기도제목은 어느 순간 하나님 나라를 그리는 설계도가 되어 있습니다. 나의 삶의 현장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지길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기도의 성장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걸 놓고 기도하라고 나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셨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개인의 고통을 통해 시대의 고통을 바라보고 기도하게 됩니다.
2- 시대의 고통에 반응할 때 헌신할 수 있게 된다.
그 다음으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은 시대의 고통에 반응할 때 헌신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11절은 그 유명한 한나의 서원기도입니다. 우리는 사사기에 나온 입다의 서원 때문에 서원하면 두렵고 무서운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입다의 서원과 달리 우리가 진정 할 수 있는 것으로 합당한 서원을 할 때 서원은 우리 신앙생활에 도움이 됩니다. 서원은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할 때 처음의 각오와 순수한 마음을 지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서원이 꼭 나쁘다고 볼 수 없습니다. 고신총회 교회헌법에서도 서원에 대해 잘 설명합니다. 우리는 헌신을 위해 서원을 할 수 있습니다.
한나가 어떤 서원을 합니까? 만약에 아들을 주시면 평생 동안 그 아들을 하나님 앞에 드리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자녀가 없어서 힘들어 하던 그녀의 기도제목이 오히려 자녀가 생기면 하나님께 드린다는 서원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드린다는 설명이 바로 뒤에 나옵니다.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겠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바로 나실인 서원을 뜻합니다. 나실인에 대한 규정은 민수기 6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포도주로 된 음식을 멀리하고, 머리털을 멀리지 말고,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표적인 나실인으로 삼손이 있습니다. 나실인 제도는 레위인이 아니어도 하나님 앞에 성별되어 헌신할 수 있는 그런 제도입니다. 나실인 제도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훈련했던 순수한 믿음을 유지하고 가나안 땅의 바알 문화에 물들지 않기 위한 장치입니다. 당시 포도주는 가나안 문화의 상징이자 유목민 전통을 가진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흔드는 독한 유혹이었습니다. 또 당시에는 가나안 단발머리가 유행하던 시대였습니다. 이런 가나안 문화, 우상숭배 문화에 저항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나실인 서원에 대한 율법입니다. 한나가 나실인 서원을 한 것을 보며 가나안 문화, 우상문화에 찌들어 있던 당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고자 한 소망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한나는 가장 갖고 싶고 소중한 것 앞으로 생길 자녀를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한나가 개인의 고통에서 시대의 고통에 공감하며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증명) 이 한나의 기도를 이루시는 분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한나는 타락한 사사시대를 회복시키기 위해 사무엘을 서원하여 바쳤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 시대를 회복시키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서원하셨습니다. 그 서원을 교리적인 용어로 영원한 작정이라고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가장 정결하고 거룩한 어린양 그리스도를 바치심으로 이 세상을 회복시키셨습니다. 우리는 한나처럼 헌신하는 것이 참 망설여지고 어렵지만 구원역사 전체에서 이 시대를 회복시키기 위해 헌신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헌신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가 헌신을 미룰수가 없습니다.
(적용) 하나님께서 한나에게 불임이라는 상황을 허용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각자 인생의 숙제를 주십니다. 우리는 그 숙제를 통해 숙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그 숙제를 풀어내며 문제의 근본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그 문제는 나 혼자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사역에 우리를 참여시키기 위해 이런 숙제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시대의 문제를 풀기 위해 우리의 것을 헌신해야 합니다. 그 때 우리가 세상의 원리와 세상의 죄악을 대항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나실인으로 쓰임 받게 됩니다. 우리의 물질, 우리의 시간, 우리의 재능을 교회와 복음을 위해 사용할 때 우리는 개인의 고통과 시대의 고통을 치유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한나가 자녀가 많아서 그렇게 앞으로 낳을 자녀를 드리겠다고 했겠습니까? 아닙니다. 아무것도 없고 밑바닥이었을 때 드린다고 했습니다. ‘아무것도 없으니까 밑져야 본전이라는 식으로 드린다고 했겠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닙니다. 그런 생각이었으면 갑자기 자녀가 생겼을 때 너무나 아깝고 아쉽고 힘들 것입니다. 한나는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 헌신하여 시대를 치유하는데 힘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쪼잔하게 한나에게 자식 하나만 안겨주고 데려가셨겠습니까? 아닙니다. 2장 21절에 사무엘 말고도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가진 소중한 것을 헌신하여 시대를 치유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 합당한 기쁨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결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우리가 가진 고통을 기도의 자리를 통해 시대의 고통에 공감하게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시대를 치유하기 위해 우리의 것을 헌신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기쁨을 더하여 주실 것을 믿는 저와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