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역자, 유혹을 이겨주다.

사무엘상 강해 시리즈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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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새벽기도에 오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월요일에 성도의 기도를 통해서 불완전한 교회에 힘을 더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이 교회에 소속되어서 헌신을 할 때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이것을 어떻게 극복하는지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우리가 헌신하고자 할 때 유혹거리가 생긴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우리가 헌신하고자 할 때 유혹의 여지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엘가나 가정이 실로에서 마지막으로 예배를 드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옵니다. 엘가나와 한나가 동침했는데 하나님께서 한나를 생각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한나의 태의 문이 닫혔지만 자신의 문제를 통해 이스라엘의 영적 문제를 깨달은 한나가 이걸 놓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다시 한나의 태를 여셨습니다. 한나는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구원역사의 토대를 닦는 귀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한나가 임신하여 사무엘을 낳았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 구하였다는 뜻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이 아이는 나실인으로서 성전에서 자라 장차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각성시키고 메시아의 계보를 세우는 역할을 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무엘이 어떻게 해서 성전에 나실인으로 헌신되는지에 대한 과정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생각해보면 그냥 한나가 사무엘을 낳고 사무엘이 젖을 뗐을 때 사무엘을 성전에 드렸더라 이렇게 할 수도 있었는데 굉장히 이 부분을 자세히 썼습니다. 왜 이렇게 썼겠습니까? 우리가 읽었을 때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자세히 썼을 것이고 우리가 이걸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고 있습니다.
21절에 보면 엘가나가 늘 하던 매년제를 드리고 또 서원제를 드리러 간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22절에서 한나는 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21절에 나온 엘가나의 서원제가 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사무엘상의 기록자가 서원제라는 말을 언급하고 또 한나가 ‘가지 않겠다.’라고 말했던 것을 언급하면서 ‘한나가 서원을 과연 지킬까?’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는 한나의 속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한나가 사무엘이 젖을 떼면 사무엘을 나실인으로 바치겠다고 했지만 100% 그런 마음만 있었는지 아니면 서원을 취소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1장 11절에서 아이가 젖을 떼는 순간 바로 바치겠습니다. 이렇게 한 것이 아니고 또 고대에는 아이의 젖 떼는 시기가 천차만별이었기 때문입니다. 1년만에 젖을 떼도 되었고 젖을 가장 늦게 떼는 아이는 일곱 살 때까지 젖을 먹이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젖을 뗀다는 표현은 당시 고대사회에서 애매한 표현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나의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이 100%인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아까 설명 드린 것처럼 본문 21절에 나오는 서원제라는 단어와 또 이번엔 가지 않겠다는 한나의 대사가 이 부분을 읽는 독자에게 긴장감을 일으킵니다. ‘한나가 마음이 바뀌어서 서원을 안 지킨다고 하면 어쩌지?’ 라는 생각이 들도록 본문이 의도합니다.
이 본문을 처음 읽는 고대의 독자들은 가나안 문학작품 중에 키르타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키르타라는 사람은 가족을 잃은 사람인데 가나안의 토착 수호신인 엘이라는 신에게 서원을 했습니다. 키르타에게 새 아내를 주면 아내 몸무게의 세 배가 되는 금을 주겠다고 서원을 합니다. 키르타는 이 서원을 잃어버리고 끔찍한 저주를 받게 됩니다. 이 이야기가 적힌 토판 마지막 부분이 유실 되어서 이야기의 엔딩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신에게 서원을 해서 어기면 안 된다는 의식이 고대근동사회 전반적으로 공유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처음 읽은 고대의 독자들에게는 한나의 행동이 굉장히 위태로워보였을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아기가 젖을 떼는 시기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인데 젖을 떼고 나면 아이를 성전에 바치겠다는 이야기는 한나 스스로에게 굉장한 유혹거리입니다.
비단 이런 것 뿐 아니라 사무엘은 한나에게 있어서 기적과도 같은 아기이지 않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귀하게 여기듯이 한나도 사무엘이 정말 귀했습니다. 여태 아이가 없다가 오랜 세월 지나서 힘들게 얻은 아이인데 얼마나 귀했겠습니까? 이런 아이를 막상 성전에 나실인으로 바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성전에는 흡니와 비느하스 같은 악한 이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걱정이 많이 되겠습니까? 서원을 취소하고 싶은 유혹이 아예 없다고 하긴 힘들 것입니다.
(적용) 한나와 같은 경우는 특별한 경우고 구약시대에 한정된 경우지만 지금 우리 시대에도 이런 비슷한 순간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께 헌신하고자 나 스스로가 약속했거나 혹은 교회에 약속을 했는데 막상 헌신을 해보니까 이게 장난이 아닙니다. 헌금을 작정했거나 봉사지원을 했는데 혹은 내가 누구 누구를 전도하기로 작정했는데 헌신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옵니다. 그리고 우리는 상황이 이렇게 될 줄 알았나? 하면서 헌신을 축소하거나 중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걸 뒤집어서 한 번 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헌신하고자 하면 탄탄대로가 예비 된 것이 아니라 유혹이 함께 따릅니다. 헌신하기로 했는데 유혹이 있다고 하면 그게 정상적인 것입니다. 제대로 된 헌신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헌신하기로 했는데 별 유혹이 없으면 아직 내가 헌신할 여력이 더 남은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자 한다면 이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예화) 제가 아직 젊을 때 체중을 조절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열심히 사역을 할 수 있는 건강적인 토대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저녁마다 샐러드만 먹고 밤엔 아무것도 먹지 않습니다. 밤 되면 배가 너무 고픕니다. 먹고 싶은 게 생각이 너무 많이 납니다. 냉장고를 열어서 음식 냄새를 맡아봅니다. 평생에 그런 걸 본적이 없는데 유튜브로 먹방 동영상을 봅니다. 제 몸뚱아리 하나를 위해 헌신하는 것도 이렇게 유혹을 많이 받습니다. 주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헌신을 하면 사탄이 얼마나 많은 유혹거리를 던져 주겠습니까? 제가 저녁에 샐러드를 배가 터지도록 먹었으면 어떻겠습니까? 냉장고 열어서 음식 냄새 맡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증명)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헌신을 하신 것을 생각해봅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가능하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의 헌신에도 십자가의 잔을 피하고 싶은 유혹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헌신을 뛰어넘으셨을 때 구원역사의 정점인 십자가의 사역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복음의 역사, 구원의 역사에 헌신하는 일은 유혹을 뛰어넘고 헌신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한나가 사무엘을 나실인으로 바치고 싶지 않은 유혹을 뛰어넘어야 했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건너뛰고 싶은 유혹을 뛰어넘으셔야 했습니다. 우리 또한 주의 나라와 복음에 헌신하는 대신 나의 편의를 일부 떼어내는 것을 각오한 헌신이 있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반드시 유혹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유혹은 신호입니다. 이 유혹이 있다면 제대로 헌신 하고 있고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지점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동역자를 통해 유혹을 극복하여 온전한 헌신을 한다.
(설명) 그 다음으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은 우리에게 유혹이 올 때 동역자를 통해 극복하여 온전한 헌신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22절에서 한나는 남편 엘가나에게 아이가 젖을 떼면 여호와의 앞에 뵙게하겠다고 이야기합니다. 23절에서 엘게나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첫 번째로 그대의 소견에 좋은 대로 하여 그를 젖떼기까지 기다리라라고 합니다. 소견에 좋은대로 한다는 이야기는 좋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사시대의 대표적인 특징이 무엇입니까? 백성들이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하는 것입니다. 사사기의 부록이라고 할 수 있는 사사기 21장 25절에는 사사시대의 특징이 무엇인지 이야기 합니다. 왜 이스라엘이 우상숭배하고 심판 받는 일을 반복하는지 설명해줍니다. 25절에 무엇이라 말씀합니까?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소견에 옳은대로 한다는 것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침체된 원인입니다.
지금 엘가나는 한나에게 당신의 소견에 옳은대로 하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무엇이라 이야기 합니까? ‘오직 여호와께서 그의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라고 말씀합니다. 이걸 좀 쉽게 번역하면 ‘당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집에 머무르시오 그러나 여호와의 말씀은 이루질 겁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엘가나는 기본적인 신앙이 있는 사람이었고 한나가 젖을 떼는 것을 빌미로 서원을 미루는 것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한나의 서원이 이뤄져야 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한나에게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24절에 젖을 뗀 후에 한나가 예물을 가지고 성막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22절과 24절에 문법적인 차이가 있는데 새벽마다 자꾸 문법 이야기를 꺼내서 죄송합니다. 근데 은혜 받으시라고 하는 것이니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22절에 한나가 젖을 뗀다고 했을 때는 문법적으로 사무엘이 젖을 뗄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아기를 주어로 하는 수동태입니다. 하지만 엘가나의 말을 듣고는 24절에서는 한나가 주어가 되어서 능동적으로 아기가 젖을 떼도록 한 것으로 나옵니다.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고대에서 아기가 젖떼는 것은 엄마의 재량에 달렸는데 한나가 단호하게 젖을 떼고 아기를 성막에 데리고 간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22절에 젖을 뗀다고 했을 땐 아기가 젖을 떼야 갈거아닙니까? 이거고 24절에 젖을 떼는건 한나가 단호하게 사무엘이 젖을 떼게 하고 사무엘을 데리고 성전에 가는 것입니다. 엘가나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에 이런 문법의 변화가 생겼습니다. 엘가나가 1장 8절에서는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한나의 속을 태우는 눈치 없는 남편이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동역자 역할을 해서 한나가 구원역사에 헌신하도록 했습니다. 우리는 헌신에 있어서 반드시 유혹이 따르는데 이 유혹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동역자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증명+적용) 예수님께서도 이런 동역자의 필요성을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전도하러 제자들을 내보내실 때 둘씩 짝을 지어서 내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잘 세워나가도록 교회라는 동역공동체를 세우셨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이 혼자서도 굉장히 뛰어난 사도지만 그의 사역이 계속해서 사람을 세우고 동역하는 시스템을 취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헌신에 따라 나오는 유혹을 혼자 극복하는 것이 너무나도 힘듭니다. 그런데 동역자가 있으면 극복할 수 있습니다. 동역자가 격려를 하든지 동역자랑 선의의 경쟁이 되든지 뭘 하든지 간에 동역자가 있으면 헌신하고자하는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눈치 없이 아내의 속을 긁던 엘가나를 등장시키지 않습니까? 아무리 부족하더라도 결정적인 순간엔 누구나 동역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변에 있는 동역자를 귀하게 여기고 함께 힘을 모아 주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 기억에 남는 과목 중에 전도학이라는 과목이 있었습니다. 실습이 있는 과목인데 학교에서 정해준 교회에 가서 그 교회 전도물품을 가지고 전도를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서 수요예배를 드리고 와야 합니다. 그리고 주말에 각자 사역하는 교회에서 전도해서 몇 명 복음전하고 등록시켰는지 보고서를 써야 했습니다. 힘든 과목이었습니다.
교수님이 전도 다닐 때 짝지를 정해줬습니다. 옆에 짝지가 있습니다. 제가 부끄러움이 많습니다. 원래 홈그라운드에서는 같이 노방 전도하는 선생님들도 많고 해서 그 선생님들이 애들 데리고 오면 제가 복음전하고 그랬는데 내 성격상 과연 친하지도 않는 쟤랑 잘 알지도 못하는 천안 땅을 돌아다니면서 전도를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짝지랑 돌아다니는데 별 대단한 걸 안합니다. 제 옆에만 붙어서 전도용품만 나눠줍니다. 그런데 희안하게 옆에 짝지가 있으니까 낯선 동네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힘이 났습니다. 옆에 짝지가 한 일이라고는 전도용품만 나눠주고 저랑 포장마차에서 간식 같이 사먹고 이것밖에 안했습니다. 저는 제가 잘 쓰는 핸드폰 어플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고 영접기도 시키는데 힘이 났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선배 중에서는 전도실습 나가서 전도 안하고 카페에 죽치고 있던 팀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한테는 묵묵히 전도용품 나눠주고 제 옆에 있어주는 동역자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홈그라운드에서 하는 전도도 아니고 제가 만든 원래 익숙한 팀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으로 전도를 하게 하셨습니다. 소심한 저에게 있어서 기적같은 일이었습니다. 그 때 제가 얼마나 연약한지 동역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주보 간지가 나갑니다. VIP 명단을 적게 되실 겁니다. 이걸 받으면 부담도 되고 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서로 동역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동역하지 않으면 능동적으로 전도하기가 힘듭니다. 서로 전도 대상자가 누군지 공유하고 기도하면서 교회의 전도사역에 동역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동역하면 놀라운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서로 서로 적도록 독려 했으면 좋겠습니다.
전도 뿐 아니라 우리가 교회에서 봉사를 할 때 서로 기도로서 격려하고 응원하는 말로서 동역해야 합니다. 동역자가 있으면 수동적이었던 나의 문법이 능동적으로 바뀝니다. 엘가나의 이야기를 들은 한나의 문법이 수동태에서 능동태로 바뀌고 헌신의 열정이 뜨거워졌습니다. 우리가 서로 서로 동역자가 되어서 우리의 문법을 바꾸어야 합니다. 부정문에서 긍정문으로 수동태에서 능동태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행동도 부정에서 긍정으로 수동에서 능동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동역자가 아무리 부족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동역자라면 반드시 나의 헌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엘가나가 그렇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연약해보이는 동역자일지라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언제 나에게 큰 임팩트를 줄지 모릅니다.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주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 정당한 헌신을 한다면 반드시 유혹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유혹을 이겨내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헌신에 따르는 유혹을 하나님이 붙여주신 동역자를 통해 잘 이겨내고 하나님의 일을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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