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제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

사무엘상 강해 시리즈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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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새벽기도에 오신 성도님들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의 앞 본문에는 한나의 노래를 통해 의인이 힘을 얻고 악인이 심판받는 역전의 복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오늘 본문에는 실제로 한나의 노래대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의인들과 그렇지 않는 악인들이 대조되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악인들이 무너뜨린 공동체가 의인들에 의해 회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하나님과 교제하지 않는 공동체는 타락한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하나님과 올바로 교제하지 않는 공동체는 타락한다는 것입니다. 12절부터 17절까지 보시면 하나님과 교제하지 않는 엘리의 아들들 흡니와 비느하스의 모습을 보여주고 18절에서 20절은 세마포를 차려 입은 어린 사무엘과 매년 실로에서 제사를 지내러 오는 엘가나 가정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또 다시 22절부터 25절은 성막에서 불의하게 섬기는 흡니와 비느하스의 모습이 보이고 26절에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사무엘의 모습이 나옵니다.
지난 번에 설교한 것처럼 2장 1절 – 11절에 보시면 한나의 기도에서 악인과 의인의 모습이 비교되고 결국 하나님께서 악인과 의인의 입장을 역전시키십니다. 오늘 본문도 이런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하나님과 교제하기에 힘쓰는 엘가나의 가정과 사무엘의 모습과 흡니와 비느하스가 성전에서 자기 역할을 못하는 모습이 대조됩니다. 우리가 사무엘상을 연속으로 읽는다고 할 때 한나의 기도를 보고 오늘 본문을 보면 앞으로 엘리제사장과 그의 아들들이 어떻게 될지 예상할 수 있습니다.
본문 12절을 보시면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행실이 나쁘다는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자세히 생각해보면 행동이 나쁜데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것이 이해가 잘 안됩니다. 하나님을 몰라서 못되게 사는 게 바른 순서인 것 같지 않습니까? 여기 행실이 나쁘다는 원어는 벨리알입니다. 벨리알은 무엇입니까? 고린도후서 6장 15절에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아니하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라는 말이 나옵니다. 흡니와 비느하스가 벨리알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오실 메시아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브라함이 예수님 올 것을 바라보았다고 하셨습니다. 다윗도 시편에서 그리스도를 노래합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오실 메시아를 믿었는데 흡니와 비느하스는 그런 신앙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벨리알이고 여호와 하나님을 모릅니다. 장차 여자의 후손이신 그리스도, 뱀의 머리를 부술 그리스도를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13절부터 흡니와 비느하스가 오실 메시아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바로 제물을 착복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제사를 드린 후 고기를 솥에다가 넣고 삶는데 이상한 관행을 볼 수 있습니다. 솥에 있는 고기에다가 갈고리를 넣어서 그걸 가져갑니다. 이건 율법에 없는 사사시대의 관습입니다. 그리고 더한 것도 나옵니다. 15절에 보면 제사장의 사환이 기름을 태우기 전인데도 제사장에게 줄 고기를 가져가려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원래 하나님께 제일 좋은 기름을 먼저 드리고 그 다음에 제물에 바친 고기 중에 남은 것을 제사장이 가져가는 게 원칙인데 제사도 드리기 전에 날고기를 먼저 요구해서 가져가려고 합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하는데도 16절 마지막 부분에 보듯이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고 협박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막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제사 제도를 통해서 장차 온 인류의 죄를 해결할 제물이 되실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며 소망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데, 흡니와 비느하스를 중심으로 한 성막의 체제가 타락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그리고 성막에 나타난 복음의 의미가 없으니까 성막이 점점 타락하고 제물을 착복하게 됩니다. 참된 예배 대신에 욕망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흡니와 비느하스가 하나님을 모르기에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대제사장의 아들들이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이 참 말이 안 됩니다. 분명 이들은 어릴 적부터 모세오경을 암기하며 성막 예배를 집례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들을 하나님을 모른다고 합니다. 이들이 벨리알이기 때문입니다. 메시아를 보내실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이 하나님과 참된 교제를 하지 않았습니다. 예배 행위가 단순한 종교적인 행위가 되었습니다.
22절에 보면 충격적인 내용이 나옵니다. 22절 하반절에 보면 엘리의 아들들이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성막에는 남자들이 제사장으로 섬기지만 또 헌신된 여인들이 성막에서 봉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의 아들들이 이 여인들과 회막문에서 해선 안 될 행동을 했습니다. 이것은 칠계명을 범한 문제도 있지만 또 다른 문제도 있습니다. 문법상으로 보면 엘리의 아들들이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회막문의 여인들과 동침을 했다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엘리의 아들들이 욕망에 이끌려서 여인들을 범한 게 아니라 어떤 목적으로 회막 여인과 동침을 한 것입니다.
당시에 우상을 숭배하던 신전에서는 신전 창기가 있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예배자와 신전 창기가 성적인 관계를 맺으면 신의 성욕을 자극해서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농사도 풍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신전 창기는 당시 고대 사회에서 그냥 매춘여성으로 대우를 받은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에서 신을 섬기는 신령한 존재로 대우받았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회막의 여인들에게 이렇게 하면 신령한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라 미혹했을 것입니다. 회막의 여인과 동침하여서 가나안 종교에서 행하던 미신적인 행위를 하나님의 성막에 도입했습니다. 성막이 미신화 되고 세속화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에게 올바른 신앙이 없으니까 이 껍데기만 남은 종교적 행위에 세속적인 내용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올바른 지식, 복음의 토대가 없으면 하나님과 참된 교제를 할 수 없고 그것은 곧 믿음의 공동체의 타락으로 연결됩니다.
(적용) 성막에서 하나님과 교제 하듯 우리는 교회 공동체에서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합니다. 교회에서는 공적인 예배를 드리고 삶 가운데서는 사적인 예배를 드립니다. 가정에서는 가정예배로 개인적으로 경건의 시간으로 사적인 예배를 드립니다. 주일부터 일상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있는 성전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삽니다.
살아있는 성전 된 우리가 공적, 사적으로 예배하지 않고 교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엘리의 아들들이 성막을 타락시킨 것처럼 우리도 성전인 우리를 타락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거하신 성령님을 근심시킬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에서 멀어진 삶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으로 충만하게 되겠습니까? 세상의 것들이 우리를 채우게 되고 우리의 삶이 점점 세속화됩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됩니다. 우리 믿음 생활에 중간상태가 유지되는 일은 없습니다.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추구하는 상태가 되지 않으면 금방 우리의 삶이 세상을 따라가게 됩니다.
2-하나님께서 타락한 공동체를 회복시킨다.
그 다음으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공동체를 회복시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엘리의 아들들이 성막을 타락시키는 장면과 정반대되는 장면도 등장합니다. 18절에 보시면 엘리의 아들들과 다른 사무엘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사무엘이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섬겼다는 말이 나옵니다. 세마포 에봇을 입은 것은 사무엘이 율법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긴 것을 말합니다. 또 사무엘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섬겼다고 하며 엘리의 아들들과 사무엘이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성막에 나실인으로 바쳐 서원을 이행했지만 매년 하나님을 예배하러 성막에 갔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예배하지 않는 반면 엘가나의 가정은 매년 하나님을 예배하러 가는 것이 대조적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에 참된 교제가 없어 타락할 때에 하나님과의 교제를 중요하게 여기는 엘가나 가정을 사용하셔서 타락한 성막을 회복시킬 사무엘이라는 인물을 준비하셨습니다. 21절에보면 아이 사무엘이 여호와 앞에서 자랐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사무엘을 자라게 하시고 타락한 성전을 회복시킬 준비를 하셨습니다.
한편 한나는 매년 성막에 올라갈 때마다 사무엘의 옷을 지어줬습니다. 옷을 지어주는 것을 특별한 애정과 관심을 뜻합니다. 그래서 야곱이 요셉에게 채색 옷을 입혀주지 않았습니까? 한나는 서원으로 사무엘을 성막에 바쳤지만 부모로서 사무엘을 내놓지는 않았습니다. 정성스레 옷을 지어주고 아마 사무엘을 위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실로의 성막에서 사무엘을 만나면 며칠 동안 신앙교육도 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엘리는 성막에서 못된 짓을 해도 그냥 형식적으로 뭐라하고 넘어가지 않습니까? 한나가 사무엘을 양육하는 것과 엘리제사장이 그의 자녀들을 양육하는 모습이 아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의 가정이 이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가정을 사용하셔서 죄에 빠진 시대를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22절부터 25절까지는 엘리의 아들들의 타락상을 보여주고 26절에는 이렇게 타락한 제사장들 가운데서 사무엘이 믿음 안에서 잘 자라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본문의 구조가 계속해서 아주 악하고 나쁜 형편을 보여주고 또 한나의 가정이 사무엘이 이 악한 상황을 회복시킬 대안으로 등장하는 그런 구조입니다.
(적용) 실로의 성막이 타락할 때 하나님께서 그 타락을 그냥 두시지 않고 대안을 마련하신 것처럼 지금 이 시대의 교회들이 본질을 잃어버리고 교제를 잃어버리고 타락할 때 하나님께서 이 시대를 회복시킬 예배자를 준비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성전이 타락해서 장사를 할 때 예수님 스스로가 성전이 되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성전 삼으셨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대안을 마련하십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는 곳, 하나님과의 교제가 필요한 곳에 교제를 세워나가십니다. 바로 여기 있는 우리들을 이 시대의 참된 예배자로 세우셔서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고 예배를 회복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우리 가정에 예배가 세워지지 않을 때 내가 가는 직장에 아무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가 없을 때 우리 자신이 가정의 참된 성전, 직장의 참된 성전이 되어 그곳에서 교제를 세워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제 없는 세상의 대안으로 예배자인 우리를 세우십니다. 코로나 시대 가운데 예배 드리기 힘들어 하는 이들을 위해서도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우리로 인해 하나님 만나는 것을 원치 않는 이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게 되는 일이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결론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공동체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잃어버리면 반드시 타락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제가 없어 타락한 세상 가운데 하나님과의 올바른 교제를 세워서 내가 소속한 공동체와 세상을 회복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일에 쓰임 받는 예배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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