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와 새로움의 나라
사무엘상 강해 시리즈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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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새벽기도에 오신 것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사울의 이야기와 사무엘의 제안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세상과 다른지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놀라운 일을 하는지 함께 그 은혜를 나누고자합니다.
1- 하나님의 나라는 용서하는 나라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하나님의 나라는 용서의 나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울의 리더십으로 이스라엘군이 30만명이 모여서 암몬 족속을 쳐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11절에 보시면 반나절을 싸워서 암몬을 무찔렀습니다. 도망가는 암몬 군사 중에 둘 이상 함께 도망간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지휘관이 후퇴를 명령했어도 제대로 후퇴하지 못할 정도로 맹렬하게 암몬을 밀어붙여서 완벽한 승리를 얻어냈습니다. 암몬에게 굴복을 하려 했던 입장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승리를 거둔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말합니다. “사울이 어찌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한 자가 누구니이까 그들을 끌어내소서 우리가 죽이겠나이다.” 이 사람들은 10장 27절에 나오는 어떤 불량배들을 말합니다. 원어로 밸리알입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를 거스르는 이들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들을 죽여야 한다고 사무엘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답을 한 사람은 사무엘이 아니라 사울입니다. ‘이 날에는 사람을 죽이지 못하리니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중에 구원을 베푸셨음이니라’라고 말합니다. 이 본문을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간 비겁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처음 사울이 백성들 앞에서 왕으로 섰을때는 밸리알들이 반대를 해도 별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때도 “하나님께서 뽑으신 왕을 멸시하면 죽여야 합니다.”라고 할 수 있었을텐데 그때는 가만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사울의 통솔 하에서 암몬을 한 번 무찌르는 모습을 보니까 이제야 밸리알들을 죽여야 한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정치판을 보는 것 같습니다. 저 사람이 권력을 안정적으로 잡기 전에는 잘 모르니까 미온적으로 대처했다가 이제 보니까 저 사람이 권력을 안정적으로 잘 잡고 저기에 붙으면 뭔가 콩고물이 떨어지니까 그제서야 아부성 발언을 하고 편을 들고 과장된 말을 쏟아 놓습니다. 제가 사울이었다면 참 같잖다는 생각을 했을 것 같습니다. 그 때는 저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막말 해도 가만 있었으면서 지금 와서 저렇게 오버를 하나 생각을 했을 것 같습니다. 그 때는 마치 간을 보듯이 저렇게 말을 해도 가만 있지 않았습니까? 침묵은 긍정의 다른 표현이 될 수 있는데 밸리알들의 말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침묵하지 않았습니까? 10장 27절에 밸리알들의 불만에 이스라엘백성들이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습니다. 사울이 그 말을 듣고 잠잠했다는 말 외에는 없습니다.
사울이 이 날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신 날이니까 사람을 죽이면 안된다고 하며 밸리알들을 감싸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전에 침묵했던 이스라엘도 함께 감싸고 있습니다. 사울은 직접적으로 자신에게 반대했던 자들도 품었지만 거기에 침묵하여 나중에 얼마든지 사울을 반대할 수 있는 계기를 준비한 이들도 품었습니다. 사울이 이들 모두를 품은 동기가 중요합니다. 단순히 사울이 국가를 통합하는 통합의 리더십을 위해서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사울이 성군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품은 것이 아닙니다. 사울이 이들을 품은 이유는 신학적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구원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품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떠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갈등이 있고 반목이 있었지만 구원의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 사역으로 모이게 된 이들을 모두 용서하고 품었습니다. 지금 암몬에게 죽지 않고 살아있는 이들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결과이기 때문에 이들을 자신의 감정과 기분이나 인간적인 명분에 따라 처분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사무엘이 아니라 왕인 사울이 했다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사울은 이때까지는 이스라엘의 왕이 어떠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복음 안에서 백성들을 잘 담아내는 직분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구원의 복음으로 인해 용서하는 그런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증명) 그리스도께서도 용서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임 당하기 전날밤에 베드로가 칼을 휘둘러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잘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한테 니 칼 한 번 잘 휘둘렀다 하지 않으셨습니다. 칼을 든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시고 베드로가 칼로 망하는 것을 바라지 않아서 그 대제사장 종 말고의 귀를 다시 붙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접적으로나마 그분을 못박으려는 이들을 해치지 않으셨습니다. 로마의 군대가 십자가에 못 박을 때도 저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다고 용서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사건이 아니더라도 예수님께서는 용서를 위해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해결할 수 없는 죄에 사로잡힌 백성들의 죄를 깨끗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 안에서 용서받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왕이신 나라가 바로 참된 용서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적용) 우리는 용서의 나라에 사는 백성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때 지나친 승리주의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이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니까 내가 가는 곳마다 잘나가고 나를 따라 예수님을 믿고 어딜가나 이기고 승리하고 이런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을 통한 용서와 평강이 베풀어지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사울이 했던 것처럼 눈에 보이는 승리에 도취된 것이 아니라 그 승리의 진정한 복음적인 의미를 파악하여 용서가 필요한 이들에게 용서를 전달해야 합니다. 내가 용서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용서를 전하고 구원의 복음을 구현해야 합니다.
우리는 용서하고 구원하기보다는 복수하고 심판하기를 좋아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영화의 시리즈가 어벤져스 시리즈입니다. 어벤지는 복수한다는 뜻입니다. 복수는 시대가 요청하는 일종의 트랜드입니다. 복수하려면 능력이 있어야 하고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략이라도 있던가 백이 있어야 합니다. 복수를 할 수 있는 건 뭔가 남다른 부분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복수하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이 복수는 폭력을 부추기고 세상을 고통으로 물들이게 됩니다.
이런 복수의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가 뻗어나갑니다. 우리의 용서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의 용서가 복수의 세상가운데 스며듭니다. 복수에 물든 세상을 해독하고 세상을 용서의 나라로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2- 하나님의 나라는 새로움의 나라다.
(설명) 그 다음으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은 하나님의 나라는 새로움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사울의 이야기가 끝난 이후에 선지자 사무엘은 주제를 환기시킵니다. 14절에 사무엘이 말합니다.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원어상으로 보면 왕권을 새롭게 하자는 뜻입니다. 고대에서 왕권은 곧 그 나라를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에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고 번역을 했습니다. 여기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이제 새로운 정권이 출범했기 때문에 조직을 개편하자는 이야기겠습니까? 아닙니다. 여기 나오는 나라, 왕권은 사울의 나라와 사울의 왕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왕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왕권을 새롭게 하자는 이 말은 하나님의 왕권을 재확인하자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왜 재확인합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왕권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이제 하나님의 대리통치자인 사울의 사역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고 순종하길 원했습니다.
이 때 왕권을 새롭게 하고 재확인하는 장소가 중요합니다. 바로 길갈입니다. 길갈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마치고 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곳입니다. 할례를 행한 곳입니다. 길갈의 뜻은 수치를 굴러가게 한다는 뜻입니다. 애굽의 노예로 수치스럽게 살던 삶을 마감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사무엘이 다시 이스라엘 백성을 길갈로 데려 갑니다. 암몬에게 모욕당하고 수치를 당했던 것을 단순히 전쟁과 복수로 씻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길갈에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며, 하나님의 왕권을 재확인하며, 언약을 다시 견고하게 하여서 수치를 회복합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의 수치가 굴러가서 나라가 새로워지고 다시금 영광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새로워지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왕권을 확인하고 언약을 다시 한 번 견고하게 하여 새로움을 경험하는 그런 나라입니다.
15절에 보시면 사울이 다시 한번 왕으로 삼아집니다. 길갈 앞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수치를 제거하고 영광을 회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화목제를 드리는데 하나님과의 언약관계가 다시 회복하여 새로워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성경에서 새로움을 말할 땐 뭔가 바뀌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를 말하고 회복을 말합니다. 죄인들이 용서 받고 무너지고 약해진 이들이 다시 힘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새로움은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새로워져야 합니다. 늘 새로움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 가운데 있으면 영적으로 지치기도 하고 죄에 물들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 방식을 보고 듣다 보면 그대로 행하게 되고 나도 모르게 세상을 닮으려고 합니다. 이 때 우리에게 새로움이 필요합니다. 세상이 주는 편의에 굴복했던 우리 자신이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앞서 하나님의 나라가 용서가 베풀어 지는 나라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용서 안에서 우리가 용서받아 죄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새로움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죄로부터 회복되어야 합니다.
(증명)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전 것이 지나가고 새 것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말하는 문맥은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은 것은 다시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사람으로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은 자신의 욕망에 따라 죄 지으면서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견고히 하는 삶은 바로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복음의 원리 안에서 죄에서 멀어지고 예수님을 위해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새로운 삶을 늘 경험해야 합니다.
(적용) 우리의 삶은 이전 것과 새로운 것 사이에서 고민하고 투쟁하는 삶입니다. 우리의 본능은 자꾸 이전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죄인으로서의 삶, 나의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 가운데 새로움을 추구해야 합니다. 죄에서 멀어지고 의와 가까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며 하나님과의 관계, 그 언약관계를 견고히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죄인으로 살던 그 수치스러운 삶들은 굴러가서 없어져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살 수 있습니까?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갈에서 예배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전의 삶을 청산하고 새로움을 입도록 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우리는 예배하는 가운데 다시 새로움을 덧입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알며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점점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세상 가운데 입은 옛 본성이 다시 한 번 제거되고 다시 한 번 그리스도로 인한 새로움을 입게 됩니다.
결론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용서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이 용서를 통한 새로움의 나라입니다. 이번 한주도 용서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시고 새로움을 덧입어 능력있는 하나님 백성으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