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사람으로 일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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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어제는 말씀에서 떠나면 능력을 잃어버리고 영적으로 얽매이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오늘은 이 사태를 해쳐나가는 하나님의 사역과 그 사역에 쓰임 받는 믿음의 사람에 대해 말씀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은 상황에 구애 받지 않고 일하신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하나님은 상황에 구애 받지 않고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상황은 별로 좋지 않습니다. 사울의 불순종으로 인해 전세는 기울만큼 기울었습니다. 한 때 삼십 삼만명이 되던 군사는 고작 육백명이 남았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믹마스까지 왔고 이스라엘은 마치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입니다.
사울은 이 와중에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2절에 사울이 기브아 변두리 미그론에 있는 석류 나무 아래에 머물렀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3절에 보면 아히야가 에봇을 입고 거기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보니까 이 아히야는 이가봇의 형제 아히둡의 아들이고 비느하스의 손자입니다. 비느하스가 누구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 할 때 그 비느하스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제사를 더럽힌 사람들입니다. 회개 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고 끝내 멸망에 이른 가문입니다. 그런데 이 가문의 이야기와 현재 사울의 이야기가 겹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버랩이 됩니다. 엘리 제사장의 가족들도 제사를 멸시하고 회개하지 않았고 사울도 제사를 멸시하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멸망한 제사장 가문의 후손인 아히야가 서 있는 것을 보면서 사무엘상의 저자가 사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보여줍니다. 사무엘상은 이런 문학적인 묘미를 통해 상황을 강렬하게 묘사하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히야가 에봇을 입고 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에봇은 제사장이 입는 옷인데 이 에봇은 종종 하나님의 뜻을 물어볼 때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제 새벽에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의 말씀의 통로인 사무엘은 이미 사울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은 버려진 제사장 가문의 후손인 아히야가 에봇을 입고 기다려도 말씀을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다음에 다루게 되겠지만 14장 37절을 보면 사울이 하나님께 그 뜻을 여쭈어도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응답을 주시지 않습니다.
한 편 어떤 학자들은 사울이 이 에봇을 가지고 점술 행위를 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에봇은 제사장이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사용하는 복식인데 이 물건 자체를 신성시하고 마치 물건에 무슨 영험한 효력이 깃든 것처럼 여겨서 이것을 가지고 우상숭배를 한 역사가 있습니다. 사사기 8장 27절을 보면 사사 기드온이 에봇을 만들어서 이것을 음란하게 위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마지막 전투에서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만나지 않습니까? 아마 종종 점술적인 것을 의존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온 아히야의 에봇을 점술적이고 미신적인 용도로 사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사울은 선지자를 통해서 정당한 계시를 받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과 방식으로 삶의 방향을 결정하려고 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상황에 일하십니다. 14장 1절에 보면 요나단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모두가 블레셋이 두려워서 바위 틈과 수풀에 숨고 여기저기 뿔뿔히 흩어지는 이 상황에, 왕은 점술을 의지하고 멸망해가는 제사장 가문을 의지하는 이 상황에 하나님께서는 일하십니다. 우리가 보기엔 절망적인 상황도 하나님께서는 충분히 일하실 수 있는 무대가 됩니다. 요나단은 자신의 무기를 든 사람에게 블레셋 사람들의 부대로 건너가자고 합니다. 생각해보면 이것이 얼마나 무모한 행위인지 모릅니다. 요나단은 지금으로 치면 국가요인입니다. 만약에 인질로서 잡히면 굉장히 큰 댓가를 치르고 다시 데려와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요나단이 블레셋의 진영으로 넘어가려고 합니다. 요나단이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은 아무도 요나단에게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자인데, 사울의 왕위를 이어야 하는데 요나단의 신변이 위태롭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나단이 당장 나서고 헌신하지 않는다고 해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믿음의 인물 요나단은 이것저것 명분이나 환경을 따지고 생각하지 않고 믿음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괴롭히는 블레셋을 심판해서 그 백성들을 구원해야겠다는 사명의식을 가지고 나아오고 있었습니다.
현재 이스라엘이 처한 환경과 무대는 결코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유리한 조건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어쩌면 이런 말도 안되는 환경이기에 하나님이 나설 최고의 무대가 됩니다. 사람으로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형편이기에 하나님만 움직이실 수 있고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온전히 기대하고 바랄 수 있는 여건이 됩니다. 이 어려운 환경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현장이 되는지를 목격할 수 있습니다.
(적용)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어려운 환경이기에, 우리가 손 놓고 지켜볼 수 밖에 없는 환경이기에 우리가 더 기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더욱 기도하게 됩니다. 그 누구도 손도 댈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권능의 손이 더 선명하게 보이게 됩니다. 어려운 가운데 우리가 기도로 버티고 부르짖으며 견딜 수 있는 이유 한 가지는 우리의 환경이 어려울수록 오히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역사의 현장이 될 줄로 믿기 때문입니다.
2-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드러낸다.
(설명) 그다음으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은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드러낸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려운 상황에 주권적으로 일하시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사울로 인해 영적인 침체를 겪고 있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요나단이라는 인물을 사용하십니다. 6절에 보시면 요나단이 말합니다.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요나단이 어떤 측면에서 믿음의 사람입니까? 그냥 무대뽀로 하나님이 하시겠지 이런 게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요나단의 믿음의 근거는 바로 언약에 있습니다. 요나단이 블레셋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외에 이방인을 지칭할 때 쓰는 일종의 멸칭입니다. 하지만 멸칭이기 이전에 이 할례는 중요한 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제일 처음 명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할례언약이라는 언약을 세우시면서 아브라함이 자손 대대로 할례를 받을 것을 명하셨습니다. 창세기 17장에 이 내용이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할례는 남성의 성기에 행하는 것인데 이 할례는 언약의 징표가 됩니다. 민족이 번성하고 왕들이 나오게 될 것이라 하는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영원한 관계를 맺을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요나단이 하는 말은 저 할례 받지 않는 자들에게 건너가도 우리는 할례를 받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베푸시는 구원은 숫자에 달려 있지 않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숫자에 근거한 구원을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언약에 근거한 구원을 베푸십니다. 물론 어제 본문에서 300이라는 숫자는 사울의 불순종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침체했다는 사실을 현상으로 드러내지만 숫자 자체가 구원의 근거는 아닙니다. 이 사실을 요나단이 잘 알고 있었고 이런 언약신학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합니다.
이후에 요나단이 놀라운 말을 합니다. 요나단은 하나님께 표징을 구하며 나아가는데 그 구하는 표징은 위험천만한 방법으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요나단이 말하길 만약에 우리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우리 모습을 보였을 때 블레셋 사람들이 다가온다고 하면 이건 하나님이 싸우지 말라고 하는 뜻으로 알고 싸우지 말고 만약에 블레셋 사람들이 우리더러 올라와보라고 하면 그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싸우라고 하는 뜻인줄로 알고 싸우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게 참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전쟁을 할 때 위에서 밑으로 향해 공격을 하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합니다. 활을 쏘더라도 밑으로 내리 꽂아 쏘는 것과 위로 올려 쏘는 것이 위력이 다르지 않겠습니까? 위에서는 아래가 훤히 보이고 아래에서는 위의 지형이 완전히 파악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 사울은 위에 있는 사람이 올라오라고 이야기 하는 것을 쳐들어가도 된다는 사인으로 받아들이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위에 있는 사람이 올라오라고 하고 활을 쏘거나 바위를 굴려도 위험천만한 상황이 오지 않습니까? 싸우기도 전에 죽을 수 있는 그런 상황입니다. 요나단은 믿음이 있었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요나단과 그 무기를 든 자가 블레셋 사람에게 모습을 보였습니다. 12절에 블레셋 사람들은 이들을 우습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발견되자마자 활을 쏘거나 한 것이 아니라 올라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보여줄 것이 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보여줄 것이 있다는 말은 본 때를 보여주겠다는 말과 같은 뜻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요나단은 이런 조롱을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인이다 하고 손발로 기어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올라갑니다. 기어서 가면 완전 무방비 상태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손발로 올라갔는데 블레셋 사람이 요나단 앞에서 엎드려 집니다. 요나단이 블레셋 사람을 쓰러뜨리면 무기를 든 자는 그 쓰러진 자의 목숨을 확실히 끊었습니다. 요나단과 무기를 든 자가 그곳에서 블레셋인들과 싸우는데 반나절 동안 두 명이서 스무 명을 죽였습니다. 아까 요나단이 말한대로 여호와의 구원은 숫자에 있지 않았고 언약에 근거한 믿음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요나단의 무공이 뛰어나서 생긴 일이 아닙니다. 요나단이 이런 전과를 올릴 때 지진이 있었습니다. 15절에 보면 땅이 진동했다고 나옵니다. 이는 큰 떨림이었더라 라고 말씀하는 부분을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하나님이 떨리게 했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요나단이 움직였지만 결국 하나님이 그 땅을 진동시키는 것으로 끝납니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단이라는 믿음의 인물을 사용하셔서 블레셋을 심판하셨습니다.
(적용)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을 들어쓰셔서 일하십니다. 그냥 배짱이 좋은 사람, 겁 없는 사람을 들어쓰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과의 관계를 잘 이해하고 체험해본 사람을 쓰십니다. 언약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을 쓰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어떤 것인지 그 복음의 본질을 잘 깨우친 사람을 쓰십니다. 요약하면 믿음의 사람을 쓰십니다. 시대가 어렵고 힘들수록 어떤 물량이나 능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 믿음의 사람은 말씀과 기도를 통해 연단되고 예배를 통해 훈련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믿음의 사람이 양성됩니다.
사울이 만들어 놓은 이스라엘의 현실처럼 이 시대의 현실 또한 많이 암울하고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거절하고 교회를 우습게 압니다. 자신의 능력만을 신뢰하고 쾌락만을 추구하며 삽니다. 이런 세상을 이기고 영혼구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단 두 명의 사람이 블레셋을 헤집고 그 땅 가운데 하나님의 떨림을 전달한 것처럼 소수의 믿음의 사람들이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떨림을 전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야 합니다. 여전히 복음이 역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져 나가고 있음을 드러내야 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을 쓰셔서 반드시 일하십니다.
결론: 설교를 맺겠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어떤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사람이 건들 엄두조차 나지 않는 상황이기에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이 더욱 드러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십니다. 여기 믿음의 사람은 말씀과 기도로 훈련되어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과의 관계를 잘 이해하는 사람 구원의 능력을 경험해본 사람을 말합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어떤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을 쓰실 때에 바로 저와 성도님들이 그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