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일의 감속화와 가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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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새벽기도회에 오신 것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일을 더디게 만드는 사람과 하나님의 일을 해내도록 하는 사람이 등자합니다. 이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교훈을 함께 살피고자 합니다.
1- 불완전한 죄인은 자신의 본성이 이끄는 대로 행동한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불완전한 죄인은 자신의 본성이 이끄는대로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번에 우리는 14장 본문을 살펴보았습니다. 사울이 순종하지 않아서 흩어졌지만 믿음의 사람인 요나단은 블레셋 적진으로 들어가 그곳에 하나님의 떨림, 하나님의 역사를 전달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적진의 혼란함을 바라보는 사울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사울이 보니까 블레셋 진영이 막 혼란스럽습니다. 블레셋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습니다. 사울의 불순종으로 이스라엘이 흩어졌었는데 이제 사울이 흩어졌습니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사울의 사명이 블레셋과 전쟁해서 이기는 것이 사울의 사명 아닙니까? 그러면 어떤 상황인 줄은 모르지만 그냥 바로 가서 싸우면 됩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누가 나가서 블레셋을 쳤는지 궁금해서 점호를 실시했습니다. 블레셋이 저렇게 우왕좌왕한 가운데 절호의 기회를 점호로 놓쳤습니다. 그래서 요나단과 그의 무기 든 자가 없어진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것을 확인하고 나서 뭔가 또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아히야에게 법궤를 가지고 오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사울의 신앙이 또 드러납니다. 사울은 아마 이 법궤를 주술적인 용도로 사용해서 하나님의 뜻을 받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사무엘이 떠난 것처럼 말씀은 이미 그를 떠났고 하나님께서 최후의 은혜로 요나단을 통해서 블레셋을 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데 자꾸 이상한 행동으로 주춤거리면서 기회를 흘려 보내고 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 나라의 순종의 시간 즉시가 안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법궤는 하고 싶으면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기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법궤를 옮기는 일은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없고서야 건드리면 안됩니다. 그런데 이전처럼 또 전쟁을 위해서 인간의 욕망과 목적을 위해서 또 법궤를 이리가져와라 저리 갖다놔라 하고 있습니다.
뒤에 이스라엘이 승리한 일은 나중에 이야기 하도록 하고 24절부터 다른 단락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싸운 이후에 굉장히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군대에서 훈련 받는 것도 힘든데 실전으로 목숨을 걸고 전쟁을 치르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런데 이 상황에 사울이 금식을 선포합니다. 금식을 하면 종교적으로 뭔가 더 능력이 생길 것 같고 자신의 불안함이 없어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뭔가를 요구할 수 있을 것 같으까 금식을 선포한 것 같습니다. 제가 부사관으로 전역을 했는데 간부역할 중에 중요한 것이 하나가 병사들이 먹는 것, 자는 것, 입는 것을 챙겨주는 일입니다. 병사들은 생활에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에 먹는 것 자는 것 이것조차도 충족되지 않으면 심적으로 엄청 고통받습니다. 간부가 굶는 한이 있어도 병사들 밥을 꼭 챙겨야 합니다. 간부들이야 퇴근하고 나서 어디 가서 사먹으면 되는데 병사들은 그게 안되기 때문에 군인들 밥챙기고 잠챙기는건 지휘관으로서 제일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 다음 날에 싸워야 할 지도 모르는 전쟁 상황에 금식을 선포했습니다.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다. 구약성경의 맥락에서 이스라엘이 지금 전쟁을 하는 건 하나님의 백성에게 대적하는 사탄의 세력을 멸하는 아주 중요한 사역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지장이 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적용) 이것이 죄인들이 가진 욕망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눈 앞에 있는데 자꾸 주춤거리고 뭔가 미신적인, 점술적인 것에 의존합니다.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아무것도 안하겠다는 것입니다. 믿음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보장된 상황에만 나서겠다는 것입니다. 금식을 한 것을 보면 역시 자신을 괴롭게 하고 고통스럽게 만들어서 신의 만족을 얻어서 신의 능력과 의도를 조종하려는 그런 미신적인 생각 아니겠습니까? 왜 자꾸 이런 잘못된 행동들을 하겠습니까?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신이 눈에 보고 자신의 손에 들어있는 것만 믿습니다. 그래서 자꾸 감당해야 할 사명에서 도망칩니다. 점술을 의지합니다. 미신을 의지합니다. 엉뚱한 행동을 합니다. 이것이 죄인의 습성이고 죄인들의 특징입니다. 자꾸 자신의 죄악된 본성대로 움직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반응하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우리도 사울과 같은 모습을 혹시나 가지고 있지 않는지 우리 스스로를 살펴야겠습니다. 눈앞에 해야 할 일이 있고 사명이 있고 하나님의 뜻이 있는데 자꾸 머뭇거리고 멈칫하고 혹은 쓸떼없는 다른 일을 하지는 않습니까? 말씀대로, 하나님 뜻대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죄인의 본성대로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아 여기에 대해 사명으로 반응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2- 죄인의 본성이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을 수 있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은 죄인의 본성이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혼란한 블레셋 진영을 봤으면 바로 쳐들어가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점호를 하고, 블레셋과 싸움을 하는 와중에 병사들을 잘 먹여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해야 하는데 금식을 선포했습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행동은 사울이 가진 죄인의 본성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나태하게 반응하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때를 놓칩니다. 하나님께 뭔가 종교적으로 요구하고 싶으니까 금식을 합니다. 다 죄인의 본성입니다. 이 죄인의 본성으로 인해 하나님의 일이 방해를 받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인물인 요나단을 통해 블레셋 진영을 한 번 흔들었으면 그건 기회입니다. 바로 가서 블레셋과 싸우면 됩니다. 그런데 사울은 불안하니까 법궤만 쳐다보고 있습니다. 블레셋 진영을 확인해보니까 자기들끼리 싸우고 죽이고 하는 것을 확인합니다. 흩어졌던 이스라엘 백성이 모입니다. 모이는 것을 보고 블레셋 사람들이 도망 가는데 이때 본격적으로 사울이 그의 군대와 함께 나가서 도망가는 블레셋을 칩니다. 23절에 여호와께서 그 날에 이스라엘 구원하심으로 전쟁이 벧아웬을 지났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불신앙했던 사울이 이끄는 전쟁이지만 하나님께서 구원을 허락하셨습니다. 믿음으로 나가서 싸우면 두 명이 가도 적진을 혼란하게 하고 승리를 거머쥘 수 있는데 사울의 나태함이 혹은 불신앙과 불안함이 승리를 늦추고 하나님의 일을 늦추는데 사용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역사를 펼치고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데 사울이라는 단 한 명 때문에 구원역사가 늦춰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해 사울이 얼마나 무능한 왕인지 보여주십니다. 사울이 가진 죄인의 본성,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이 늦춰졌습니다. 미신적인 행위를 의지하고 쓸떼없는 일로 시간을 보내는 사울을 보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역사를 제 때 경험할 수 있는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전쟁을 해서 힘들고 어려운 상황인데 사울이 금식을 선포하지 않았습니까? 음식물을 먹는 사람은 저주 받을 것이라 이야기해서 전쟁으로 고생한 군인들이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수풀에 들어갔는데 그곳에 꿀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막 꿀이 흐르는데 사울이 저주를 선포한 것 때문에 손도 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요나단은 사울이 저주를 선포할 때 그 자리에 없어서 꿀을 먹었습니다. 27절에 요나단이 꿀을 먹을 때 눈이 밝아졌다는 말이 나옵니다. 사울은 금식을 명령하고 저주를 선포했는데, 오히려 요나단의 눈은 밝아졌습니다. 밝아졌다는 단어는 오르이고 저주는 아루르입니다. 오르와 아루르가 발음이 비슷하지 않습니까? 일종의 언어유희입니다. 저주를 했지만 오히려 눈이 밝아졌다고 조롱하듯이 표현합니다. 사울의 판단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28절에 병사 중에 한 사람이 사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합니다. “당신의 부친이 백성에게 맹세하여 엄히 말씀하시기를 오늘 음식물을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백성이 피곤하였나이다.” 여기 피곤하다는 것은 연약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요나단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꾸을 조금 맛보고도 눈이 이렇게 밝아졌는데 오늘 전쟁에서 탈취한 것을 얻었으면 블레셋 사람들을 더 많이 잡을 수 있지 않았겠느냐? 하고 이야기 합니다. 29절에 사울이 이 땅을 곤란하게 해다는 히브리어 아카르는 괴롭게 했다는 뜻입니다. 전쟁을 하고 있는 백성들을 굶겨가지고 백성들을 괴롭게 했다는 뜻입니다. 요나단이 말한대로 백성들을 금식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먹게 했으면 아마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더욱 잘 감당했을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물론 어려운 일이 있고 특별한 상황이 생기면 금식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황을 잘 판단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도 아닌데 전쟁중에 병사들에게 밥을 굶기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명을 감당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울은 이렇게 말도안되는 금식을 통해 마치 하나님께 조르듯이 우리가 이렇게 굶으니까 전쟁 이기게 해주세요 라고 합니다. 자신의 쓸떼없는 종교적 고집이 있었지만 동시에 이렇게 안하면 하나님이 안해줄 것 같으니까 하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 여전히 자리를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죄인의 본성 때문에 블레셋을 더 칠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블레셋 군대라면 이스라엘과 전투를 하는데 금식을 하고 전투를 했겠습니까? 블레셋이 아니라 그 어떤 군대라도 병사를 굶기고 전쟁을 치르게 하는 멍청한 군대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 사명을 다 하지 못하니까 오히려 세상 보다 더 엉망진창인 상태가 됩니다.
(적용) 혹시 우리의 타락한 본성이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지 않습니까? 기도하면서 조금만 더 참으면 되는데, 말씀에 은혜 받은 만큼 조금 더 헌신하면 되는데 말씀과 기도로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얼마든지 제어할 수 있는데 그걸 하지 않아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을 지체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나태함과 불신앙, 순간에 타오르는 감정이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더디게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당평교회에 와서 전도에 대해 들었던 이야기중에 정말 공감한 이야기가 이겁니다. 우리가 전도를 할 때 우리 자존심은 십원짜리 하나만도 못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잠시 자존심을 내려놓고 우리 자신을 내어놓으면 복음이 전달되고 주님께로 돌아올 사람이 있는데 우리 자존심이 뭐가그렇게 큰 가치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자존심이 굉장히 나쁜 일에 사용될 수 있습니다. 사탄의 무기는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들입니다. 타락본성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타락한 본성을 사용해서 자꾸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일꾼으로 우리를 세웁니다. 우리는 말씀과 기도로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죽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우리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우리안에 있는 타락한 죄인의 본성의 실체를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더디게 만든다는 것을 이해하고 이 본성들을 말씀과 기도로 성령의 능력으로 죽여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사울처럼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더디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요나단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역을 해내는 주의 군사로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저와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