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한 공동체를 회복하는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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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일을 지체시켰던 사울로 인해 공동체가 타락에 물들지만 복음을 통해 타락하는 일이 중단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 불신앙은 공동체를 타락시킨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불신앙은 공동체를 타락시킨다는 것입니다. 어제 본문에서 사울의 타락한 본성이 하나님의 일을 지체시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사울 한 명의 타락이 온 공동체에 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울의 잘못된 불신앙 때문에 공동체가 영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받게 됩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믹마스에서부터 아얄론에 이르기까지 블레셋 사람들을 쳤습니다. 본문에서 그들이 심히 피곤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어제 설명 드린 것처럼 여기서 피곤하다는 것은 잠이 온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조종하기 위해 선포한 금식 때문에 밥을 못 먹어서 힘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32절에 보시면 백성들이 굶주림 때문에 하면 안될 행동을 합니다. 블레셋에게 탈취한 양과 소와 송아지들을 끌어다가 땅에서 잡아 피째 먹습니다. 성전이 세워지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기를 먹기 위해서는 제사를 드린 후에 먹어야 합니다. 성전이 세워지고 산당 제사가 축소되면서 그 이후에 고기를 먹기 위한 개인적인 도살이 허용되었지만 지금 본문의 시대에는 제사를 지내서 하나님께 드릴 기름을 빼고 율법에서 먹지 말라고 피를 제거한 뒤에 고기를 먹을 수 있습니다. 32절의 상황은 아마 사울이 선포한 금식의 기간이 끝난 후에 백성들이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가축에게 달라 들어서 그것을 제사도 없이 도살하여 임의로 조리해서 먹는 그런 상황입니다. 유대인에게는 코셔라는 음식법이 있습니다. 고기의 핏물을 완전히 빼서 요리를 하는 요리법입니다. 이슬람에게 할랄 식품이 있듯이 지금의 유대인에게도 코셔라는 조리법이 있습니다. 전통유대인들은 아직도 코셔법을 지킵니다. 대표적인 예로 이스라엘에 코셔 햄버거집 코셔 피자집이 있습니다. 랍비에게 식품 제조 과정을 다 확인 받은 햄버거나 피자를 판매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렇게 코셔법을 엄격하게 지키는데 과거에는 어땠겠습니까? 고기를 피째 먹지 말라는 율법을 어겼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뒤늦게 바위를 가져와가지고 거기서 제사를 드리고 그 제사에서 나온 고기를 제공합니다. 한 편 이 제단은 완전하지 못한 제단인 것 같습니다. 제단을 쌓은 대표적인 인물이 사무엘과 다윗인데 사무엘과 다윗이 쌓은 제단은 장소가 구체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사무엘은 라마에 제단을 쌓았고 다윗은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제단을 쌓은 지명은 나오지 않습니다. 후대에 기억될 만한 그렇게 완전한 제단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게다가 ‘처음 쌓은 제단이었더라’라는 부분을 원어상으로 사울이 여호와께 제단을 쌓기 시작했다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이것은 제단을 쌓았는데 완성이 안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무엘상 기자는 사울의 불신앙을 보고 그가 쌓은 제단을 완전한 제단으로 보지 않고 지명조차 남기지 않습니다. 뒤늦게 제단을 만들고 수습을 했지만 수습이 제대로 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울의 불신앙으로 인해서 사울이 하나님의 뜻과 전혀 상관없는 금식을 선포하는 바람에 이스라엘 백성 중의 일부가 율법을 어기는 일이 생겼습니다. 백성들이 피째 고기를 먹어 율법을 어기게 된 이유는 바로 사울 때문입니다. 사울의 타락이 공동체를 타락시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불신앙은 개인에게만 영향을 주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안 좋은 영적인 영향력을 미치게 됩니다.
(적용) 우리는 모두 공동체 안에서 함께 예배 하며 함께 동역하며 함께 교회를 세워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영향력을 주고 있습니까? 우리는 서로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쳐야 합니다. 저 분만 보면 내가 더 열심히 기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저 분만 보면 나도 더 열심히 헌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저 분만 보면 내가 열심히 섬겨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야 합니다. 이런 생각들이 교회에 있어야 합니다. 내가 바로 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혼자 있을 때는 알 수 없지만 나의 말과 행동이 공동체에 영향을 미치고 공동체의 영성을 형성하는 재료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좋은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좋은 재료가 되어야 합니다.
혹시 좋은 영향력을 미칠 자신이 없어서 공동체에서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만히 있는 것 자체로 안 좋은 영향력입니다. 가만히 있는 것이 뭘 하다가 실수할 일도 없고 튀지 않으니까 좋은 것 같지만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를 더 아름답게 세우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블레셋 군대를 보고도 자신의 사명을 다하지 않고 이스라엘을 타락의 길로 이끈 사울처럼 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가만이 있는 것으만로도 공동체를 좀먹습니다. 우리는 선을 행하되 부지런히 행해야 하고 공동체가 아름답게 세워져 나가도록 해야 합니다.
2- 불신앙은 복음의 능력 앞에서 꺾인다.
(설명) 공동체를 타락시키는 불신앙은 어떻게 꺾이게 됩니까? 복음의 능력으로 꺾이게 됩니다. 만약에 개인의 불신앙이 계속해서 공동체를 전염시키기만하고 여기에 브레이크를 걸 만한 것이 없으면 모든 믿음의 공동체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나약해진 공동체에 복음의 능력을 주셔서 다시 공동체가 회복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36절에 사울이 밤에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해서 동틀 때까지 그들 중에서 탈취하고 한 사람도 남기지 말자고 그렇게 말합니다. 백성들도 여기에 대해 찬성을 표합니다. 사울이 하나님께 이렇게 해도 되는지 묻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이 사울을 떠난 것처럼 말씀은 사울을 떠났습니다. 여태껏 하나님 뜻에 관심이 없다가 갑자기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생긴것이 뜻밖에 일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그냥 안가면 될 것을 하나님의 뜻을 하루동안 기다립니다. 그러니까 블레셋을 쳐라는 말을 기다린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기다린 것입니까? 아니면 사울의 욕망을 포장해줄 명분을 기다린 것입니까? 네, 사울의 뜻을 정당화시켜줄 어떤 것을 기다린 것입니다.
38절부터 황당한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말씀하시지 않으니까 사울이 갑자기 지휘관을 부릅니다. 지휘관을 불러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는 죄가 누구에게 있는지 알아보자고 이야기 합니다. 죄가 누구에게 있습니까? 우리가 계속 사무엘상을 읽어봤기 때문에 이게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찌 알고 있습니다. 여기 계신 누구에게 여쭤봐도 사울에게 책임이 있다고 답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본인만 본인이 불신앙이 있고 타락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39절에서 사울이 자기 아들 요나단을 들먹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두고 맹세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오지 않는 원인이 요나단에게 있다면 반드시 죽게 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일주일 전 본문에서 보신 것처럼 요나단은 점호를 하지 않은 채 적진에 임의로 가서 전투를 치른 전적이 있습니다. 사울은 아마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오지 않게 된 동기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어처구니가 없는 사고방식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자신에게 원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꾸 타인에게서 원인을 찾습니다. 40절과 41절을 보면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뭔가를 뽑는데 마치 제비뽑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 제비를 뽑을 때 사울과 요나단이 제비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사울과 요나단 사이에서 뽑으니까 요나단이 뽑힙니다. 사울이 요나단에게 행한일을 말해보라고 합니다. 요나단은 사울이 선포한 금식기간에 꿀을 조금 맛본 것을 이야기합니다. 사울은 아들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끔찍한 말을 합니다.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사울이 공동체에 일으키는 악영향이 최고조에 오릅니다. 지금 본인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떠났는데 아무런 상관 없는 사람을 잡고 있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아들 요나단을 희생양으로 삼아서 죽인 후에 블레셋을 잡고 싶었거나 아니면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량처럼 아끼는 사람을 엄하게 처벌해서 군사의 사기를 끌어올리려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 되었던 요나단은 목숨을 잃어버릴 정도의 잘못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사무엘상의 이야기를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 희생해서 안될 것을 희생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 때 백성들이 등장합니다. 39절에 제비뽑기 하기 전 사울이 내 아들이라도 잘못했다면 죽을 것이라 했을 때 백성들은 가만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제비뽑기 결과가 나온 이후에 사울이 요나단을 죽인다고 하니까 백성들이 나섭니다. 45절에 보시면 이스라엘에 큰 구원을 가져다준 요나단이 죽을 수 있습니까? 그는 하나님과 동역했습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사울은 그의 불신앙과 타락한 본성으로 인해 요나단을 죽이려 했지만 요나단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가 하나님과 동역하며 이룬 구원역사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복음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울의 불신앙에서 나온 판단을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동참하여 자신들을 구원해준 복음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욕망을 따르기 위해 이것저것 하나님의 뜻과 상관 없는 불신앙적인 행동들을 했고 폭력적인 다스림을 펼쳤지만 백성들이 선택한 것은 결국 복음이었습니다. 요나단을 통해 백성을 구원한 하나님의 사역을 의지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제비를 뽑아서 선택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인데 왜 아무런 잘못이 없는 요나단이 뽑혔겠습니까? 바로 요나단이 처형될 위기에 있을 때 사울의 불신앙이 정답인지 요나단이 가진 복음의 사역이 정답인지 백성들이 깨닫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불신앙적인 사울의 횡포는 복음 앞에서 꺾였습니다. 하나님이 요나단을 통해 베풀었던 그 구원의 은혜 앞에서 사울의 횡포가 꺾였습니다. 사울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적용) 믿음의 공동체가 불신앙으로부터 참된 신앙으로 회복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복음의 진리입니다. 때론 우리가 타락하여 공동체를 부정적인 영향력으로 물들일 때가 있지만 우리는 복음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개개인이 복음을 깊이 묵상하고 그 가치를 다시금 깨달아서 더 이상 우리 자신이 부동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베푸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불신앙이 쓸떼없는 횡포를 부릴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잘못된 판단과 우리의 상처입은 자존심이나 우리의 나태함이 공동체에 안좋은 영향을 미치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가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공동체를 위해 죽으시고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공동체를 바르게 세우기 위해 헌신하고자 힘써야 합니다. 개개인이 복음에 깊이 물들 때에 우리 믿음의 공동체는 계속해서 회복의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결론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때론 우리의 불신앙이 공동체에 안좋은 영향을 주지만 다시 복음으로 돌아갈 때 우리는 공동체의 회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복음의 능력으로 내가 속한 믿음의 공동체를 회복시키는 우리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