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의 나라

사무엘상 강해 시리즈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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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새벽기도에 오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지난 번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보지 않고 자신의 욕망으로 읽어서 사울이 하나님의 뜻을 그르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을 그렇게 받아들인 결과로 사울이 어떻게 되는 지를 보여줍니다.
1- 하나님께서는 업적의 나라를 무너뜨리신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하나님께서는 업적의 나라를 무너뜨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보신 것처럼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자신의 욕망대로 해석하여 아각왕을 살려서 인질로 두고 가축중에 좋은 것들을 남겨 둡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울을 보시고 11절에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후회한다는 이 표현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고 완벽하신 분인데 하나님이 후회하실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후회라고 할 때 첫 번째로는 이것이 문학적인 표현이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보거나 만질 수 없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눈이 있고 손이 있고 심지어 날개가 있다는 말까지 나옵니다. 하나님한테 인간의 신체와 같은 것들은 없지만 어떤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이 마치 손이 있는 것처럼, 날개가 있는 것처럼 표현하기도 합니다. 오늘 후회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아니라 후회하실 리가 없지만 문학적인표현에 의해서 후회했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만큼 사울의 만행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이 부분 말고 후회한다는 표현을 또 본 적이 있습니다. 어디에서 보았습니까? 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시고 홍수 심판을 내렸을 때 하나님이 후회한다는 표현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개역개정에 한탄하셨다고 되어 있는데 후회한다는 뜻입니다. 보드너 라는 학자는 하나님의 후회 뒤에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고 그렇게 본문을 해석합니다. 하나님의 후회는 과거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새로운 소망을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신다는 건 다윗 왕조가 들어설 것을 암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11절에 사울이 돌이켜서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회한다고 하셨습니다. 몇 번 잘못을 해도 돌이켜서 다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면 될텐데 사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하나님께 순종하기 보다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왕인지 업적을 남기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12절에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기 위해서 아침에 일찍 일어났는데 어떤 익명의 보고자가 사무엘에게 사울의 행방을 알립니다. 사울이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 기념비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기념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본문은 분명히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웠다고 말씀합니다. 기념비로 번역한 야드라는 히브리어는 손을 뜻합니다. 사울은 아말렉과 의 전쟁을 하나님께서 그분의 손을 펼쳐 구원하신 사건이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했다고 그렇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사울이 기념비를 세웠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위해 사역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업적을 남겨서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 왕인지 보여주고자 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생각하면 사울이 왜 아각왕을 살려 두고 인질처럼 붙들고 있는지, 왜 좋은 가축들을 남겨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의 관심은 하나님이 전쟁을 하라고 했던 그 구원역사적인고 신학적인 의미가 아니라 그저 전쟁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 왕인지 보여주는 데에 그 관심이 있었습니다.
(적용)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우리에게도 혹시 사울과 같은 모습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회를 섬기고 세상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고 주신 것들이 있습니다. 사울에게 왕의 직분을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교회의 직분을 주시고 세상 속에서 직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것으로 무엇을 하려고 합니까? 나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한 업적을 세웁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우리는 누구나 다 자신의 업적, 실적, 이력 같은 것들을 남기려고 애를 씁니다. 그것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가진 능력과 재능으로 의미 있는 어떤 것을 남기는 것이 뭐가 죄가 되겠습니까? 하지만 이것이 우상이 되면 안됩니다. 내 자신이 드러나기 위한 수단이 되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드러내는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하는 일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나의 섬김이, 나의 열심히, 나의 정성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섬김으로 나타나고 하나님의 열심으로 나타나야 하고 하나님의 정성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것을 통해서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사역을 펼칠 재료로 사용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업적이 우상이 되는 순간 그것을 무너뜨리십니다. 우리는 업적을 우상 삼지 말고 하나님의 일을 위한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사울은 이 업적을 우상으로 만들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기까지 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2- 하나님께서는 순종의 나라를 세우신다.
(설명) 그 다음으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하나님은 순종의 나라를 세우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뭔가 대단한 업적을 세우고, 힘과 권력을 과시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올려드리며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중요한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11절에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한다고 하셨습니다. 아까 말씀드린대로 하나님이 후회한다고 하시는 것은 앞으로 새로운 왕조가 세워질 것임을 암시한다고 했습니다. 사무엘은 이 말씀을 듣고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었다고 성경이 말합니다. 여기 근심했다는 말 히브리어 “이하르”는 분노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무엘이 분노하여 밤새도록 하나님께 부르짖었다는 것입니다. 이 분노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사울에 대한 분노였다면 굳이 하나님께 밤새도록 부르짖을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냥 사울에게 화를 내면 되지 않습니까? 하지만 분노했다고 한 이후에 밤새도록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을 보면 이 분노는 하나님을 향한 분노입니다. 이하르라는 단어가 통상적으로 분노라는 뜻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역개정이 이것을 근심이라고 좀 수위를 조절해서 번역한 것은 감히 인간이 하나님께 분노할 수가 있나 그것도 사무엘이 그럴수가 있나 하는 생각에서 이렇게 번역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사무엘은 하나님께 분노했습니다. 왜 분노했는지 정확하게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현재 이스라엘을 지도하는 직분자는 거의 사울과 사무엘 밖에 없는 상황이라 동역자를 잃는데서 오는 분노일 수도 있고 혹은 이렇게 될 줄 다 아셨을텐데 왜 진작 제대로 된 사람을 정해주지 않고 이렇게 될 사람을 정하셨습니까? 하는 생각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쨌건 사무엘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에 100퍼센트 공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분노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는 사무엘은 하나님께 순종했습니다. 새로운 왕을 세울 것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에 동의했습니다. 분노에 찬 사무엘의 부르짖음은 하나님의 뜻을 꺾고 반항하기 위한 부르짖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뜻을 하나님께 맞추는 과정이었습니다. 기도란 이런 것입니다. 나의 들끓는 감정 때문에 하나님께 거칠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늘 선하고 부드러운 것만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 마음을 쏟아놓을 때 우리는 단순히 감정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과 뜻이 하나님께 맞춰지는 일이 생깁니다.
이런 사무엘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사울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사무엘이 사울에게 갔습니다. 13절에 사울이 사무엘에게 아주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합니다. 당신은 여호와의 복을 받으소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아시는 것처럼 사울은 자신의 업적을 위한 전쟁을 했지 하나님의 명령을 제대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 양의 소리와 소의 소리는 뭡니까 하고 질문합니다. 사울은 마치 입에 기름이라도 바른 것처럼 대답합니다. “백성이 양들과 소들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겨서 제사드리려고 했습니다.” 사실 이 일은 사울이 주도한 일입니다. 백성들이 그렇게 한 것을 마지 못해 내버려둔 것이 아닙니다. 9절에 사울과 백성이 같이 가축을 남겼다고 되어 있는 것 같지만 원문상으로 보면 동사가 단수로 되어 있기 때문에 사울이 주도해서 이런 일을 벌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쨌든 백성이 그랬다고 핑계를 대고 하나님을 위해서 그랬다고 변명하는 사울의 청산유수를 사무엘이 끊어버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합니다.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때 하나님이 기름부어 왕으로 세워주셨고 죄인 아말렉을 다 진멸하라고 했는데 어찌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고 탈취하기에만 급해서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는 일을 했습니까?
사울이 회개하지 않고 또 변명합니다. 아까 전과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진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해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왔고 아말렉 사람을 진멸했는데 다만 그 마땅이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가져와서 제사 드리려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어보면 차라리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뜻이 맘에 안들면 분노하며 기도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든 하나님 이게 뭡니까 왜그러십니까 하고 부르짖다가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순종하는게 낫지 않습니까 사울이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사무엘이 따졌을 때를 대비해서 어떻게든 자신의 행동을 포장하려고 대답을 다 준비한 느낌이 듭니다. 끝까지 자신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다고 하나님을 위해서 그랬다고 백성들이 그랬다고 하며 자꾸 사무엘이 제기하는 문제점을 교묘하게 피해서 대답합니다.
사무엘이 이 대답에 결정타를 날립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느냐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를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이야기의 핵심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는 당연히 중요합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되려면 가장 기본적인 것이 순종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가 아닌데 내 맘대로 이렇게 하면 내가 좋으니까 하나님께서 이걸 좋아하실 거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죄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우선 맞추고 하나님 이걸 기뻐해주세요. 라고 하는 것은 내 뜻대로 하나님의 뜻을 조종하려는 것입니다. 내 뜻을 열심히 빌어서 신의 뜻을 바꾸려고 하는 것은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열심히 빌어서 내 욕망을 성취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상숭배의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기는지 참된 사랑과 충성으로 하나님을 섬기는지에 대한 기준은 바로 순종입니다. 하나님께 순종을 시키면 우상숭배고 하나님께 순종을 하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온갖 핑계를 들어 개인의 욕망이 이뤄지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세워지는 순종의 나라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순종으로 이뤄지고 순종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순종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이라고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죄인으로 죽는 것이 즐거우셨겠습니까? 성경에 의하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피가 땀이 될 정도로 고뇌하고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피하게 해달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치열한 기도 끝에 결국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순종하시고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전 세계로 뻗어나가도록 하셨습니다.
(적용)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우리도 순종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죄인의 본성이 우리에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어느 정도 포괄하고 나의 욕망도 채울 수 있는 그런 논리를 개발하려고 합니다. 이성적이고 똑똑하면 자신의 욕망을 잘 이길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똑똑함으로 자기 욕망을 아주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하나님만 속일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속입니다. 자기가 잘못하지 않았다고 스스로가 착각을 해버리고 영적으로 병들게 됩니다. 차라리 하나님 앞에서 울고 하나님께 따져서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예수님처럼 어차피 안 들어줄 어리석은 기도를 하는 게 낫습니다. 이 잔을 피하게 해달라는 기도 하나님이 어차피 안 들어줍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는 길을 가게 됩니다. 어리석은 기도 같지만 어리석은 기도가 아닙니다. 가장 지혜로운 기도입니다. 그 기도를 통해서 가장 선한 하나님의 뜻을 찾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화내는 것이 낫고 차라리 어리석은 기도가 낫습니다. 이상한 논리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죄를 짓는 것보다 낫습니다. 그것이 나을 정도로 하나님은 순종을 중요하게 보시고 우리는 순종의 나라를 세워야 합니다.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하나님은 업적이 아닌 순종의 나라를 세우십니다. 업적을 세우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방해가 되고 개인의 욕구를 채우는 수단으로 전락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무너뜨리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순종의 나라를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나의 욕망을 교묘하게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는 그런 논리로 사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하나님 앞에서 부르짖으며 기도하며 나의 뜻을 꺾어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나의 욕망을 채우는 하루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하루 보내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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