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가운데 피어난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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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새벽기도에 오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의 희망이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 받았는데 과연 이스라엘이 어디에 마음을 둬야 할지에 대해 말합니다.
1- 인간이 만든 희망은 완전하지 않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인간이 만든 희망은 완전하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듭해서 불신앙을 가지고 불순종하는 사울을 버려서 왕이 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사울 본인 뿐 아니라 사울에게 기름을 부은 사람인 사무엘에게도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것 같습니다. 16장 1절에 보면 사무엘이 슬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맨 처음 사울을 왕이 되지 못하게 하겠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 사무엘은 밤새도록 분노하며 부르짖었고, 지금은 슬퍼하고 있습니다. 여기 슬퍼한다는 단어 히트아벨은 죽은 자를 위해 애도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사무엘의 슬픔은 사람이 죽었을 때 슬퍼하는 정도의 감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사사시대를 벗어나서 왕조를 세워서 이제 이 왕조를 통해 대대로 하나님의 통치를 보여주는 것이었는데 그 비전이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사울에게 처음 기름 붓고 왕을 세웠을 때 사울과 사무엘이 밤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까? 이 두 사람은 이스라엘 최초의 왕정체제의 동역자로서 서로를 생각하는 그 마음이 각별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사울이 하나님 나라의 비전 안에서의 동역자가 되지 못합니다. 굉장히 슬펐을 것입니다.
사울은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의 희망이었습니다.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 440년에서 벗어나 광야 생활 40년을 지났습니다. 사사시대 400년을 지났습니다. 애굽에서 탈출하고 나서 정착하고나서 이제야 제대로 된 왕을 갖추고 나라의 체제를 정비합니다. 드디어 나라다운 나라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뭐든지 시작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시작이 잘 되면 누구든지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를 합니다. 시작이 잘못되면 과연 앞으로는 잘될까 하는 의구심이 생기고 마음이 꺾이게 됩니다. 사울은 이스라엘 왕정체제의 첫단추였습니다. 그동안 왕이 없어서 서러웠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희망이었습니다. 이 희망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 희망은 결국 절망이 되었습니다. 절망이라고 할 때는 희망이 끊어진다고 해서 절망이라 표현한다고 합니다. 왜 절망이 되었습니까? 사울 왕은 사람이 만들어낸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메시아의 소망을 가져다 주실텐데 그 소망을 믿지 못해서 임의로 만들어낸 것이 바로 사울왕을 세우자는 희망입니다. “열방의 다른 나라들처럼 왕을 세우자! 전쟁을 할 왕을 세우자!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하니까! 우리도 그렇게 한 번 해보자! 그러면 좀 사는 게 괜찮아지겠지!” 이런 그릇된 희망을 만들어냈습니다. 우리가 사무엘상의 이야기를 읽은 것처럼 이 희망은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불순종을 반복하다가 결국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만들어낸 희망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이 희망은 언젠가는 끊어지게 됩니다. 희망은 절망으로 변질 됩니다. 사람이 만든 것의 한계입니다.
(적용) 우리는 나름대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희망이 없으면 무슨 사는 재미가 있겠습니까? 금요일 아침에 눈을 뜨면 내일부터는 좀 쉬겠구나 하는 희망이 생깁니다. 여름이 다가오면 한 해의 절반을 살면서 많이 지쳤지만 좀 있으면 여름 휴가를 가겠구나 하는 희망을 품으면서 그것을 위로 삼으면서 하루 하루를 살게 됩니다. 여름 휴가가 지나면 또 무슨 재미로 사나 했다가 추석이 오겠지 하고 여름이 지나 가을이 되면 좀 시원해지겠지 합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영화의 후속편이 나오고 자녀가 좋은 학교에 들어가는 소식으로 또는 진급 하는 소식으로 위로를 얻습니다. 정권이 교체되고 거리두기가 완화되면 사업이 좀 나아지겠지 하고 희망을 가집니다. 우리는 이런 소박한 희망부터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큰 희망까지 이런 희망들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희망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희망에는 유통기간이 있습니다. 상황이 바뀌면 얼마든지 절망으로 변질됩니다. 사람이 만든 희망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사무엘이 왜 밤새 하나님께 부르짖고 왜 계속해서 슬퍼했습니까? 희망을 너무 간절히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희망을 소망으로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여러 희망들은 잠시 잠깐의 기쁨을 줄 뿐입니다. 거기에 얽매이면 희망이 끊어질 때 우리의 기쁨도 함께 끊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어질 희망이 아니라 끊어지지 않는 소망에 우리의 기쁨을 두어야 합니다. 여기까지 말씀 드리면 희망과 소망에는 또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하실 것 같습니다. 본문이 주는 그 다음 교훈에서 우리는 소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2- 하나님께서 절망 가운데 소망을 두신다.
(설명) 그 다음으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하나님께서 절망 가운데 소망을 두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슬퍼하는 사울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끊어진 희망 때문에 슬퍼하는 사무엘에게 소망을 제시하십니다.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이제 하나님은 사람들의 눈에 좋은대로 사람들의 목적대로 세운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으신 왕, 하나님의 나라의 영원한 목적을 위한 왕을 세우신다고 하십니다. 늘 불순종하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협하는 왕 대신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 계획의 다리가 되어줄 왕을 세우신다고 하십니다. 희망은 사람이 만들어서 위로삼는 것이지만 소망은 하나님이 만드시는 것입니다. 희망은 일시적이지만 소망은 영원까지 이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소망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베들레헴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베들레헴은 가뭄에 고통당하던 나오미와 룻이 다시 돌아온 회복의 장소입니다. 아무것도 없었던 모압 여인 룻이 환대를 받고 결혼을 하고 자녀를 얻은 곳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이 베들레헴에 장차 죄에서 우리를 구원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십니다. 구원역사의 거대한 물줄기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이 베들레헴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되는 다윗을 마련하셨습니다. 사무엘에게 그리로 가서 그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하셨습니다.
사무엘이 끊어진 희망을 정리하고 다시 소망을 찾아 베들레헴으로 갑니다. 그런데 그 가는 길이 순탄하지 않습니다. 소망을 찾아가는 길은 원래 순탄하지 않습니다. 사무엘의 경우에 어떤 어려움이 있었습니까? 2절에 보시면 사무엘이 하나님께 말합니다. “제가 어떻게 왕을 세우러 갈 수 있겠습니까? 사울이 저를 죽이려고 할 겁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주 잘 알고 있는 유명한 선지자입니다. 사무엘이 어디로 이동한다고 하면 소문이 나게 될 것입니다. 혹시 사무엘이 이동하는 소식이 사울 왕에게 들리고 사울 왕 말고 새로운 왕이 세우진다는 이야기가 사울왕에게 들어가면 사무엘은 무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끊어진 희망이 진정한 소망에게 나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의 발목을 잡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끊어질 희망, 절망은 자꾸 우리 삶을 붙듭니다. 소망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게 만듭니다. 희망을 저버리고 소망을 추구할 때 나오는 여러 가지 불편함과 어려움이 우리가 소망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하지만 소망을 찾아가는 길은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망을 찾아가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고 이새를 제사에 청하라” 이 부분이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사무엘한테 거짓말을 하라고 하나 하는 그런 논란이 있습니다. 사실 왕을 세우러 가는 건데 그걸 어떻게 제사 지내러 간다고 뻥을 치라고 하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목적만 선하면 거짓말을 해도 되는건가 하는 논리도 등장합니다. 일명 하얀 거짓말이라고 해서 착한 거짓말을 해도 되는가 하는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거짓말은 절대 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한 목적으로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선한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우리가 자체가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 애쓰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제사를 드리라고 하실 때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베들레헴에서 사무엘의 제사를 받으십니다. 제사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이새의 집에서 왕이 될 자가 누구인지 찾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통해 사무엘을 지켜주는 것이지 사무엘에게 거짓말을 시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을 보면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새의 집에 몇 번째 아들 누구라고 이렇게 말씀하시면 될텐데 왜 자세하게 말씀해주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이유는 아들들 가운데 왕을 임명하는 과정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교훈이 있기 때문입니다. 16장 8절부터 해서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들을 쭉 만납니다. 첫째 엘리압을 만나는데, 사무엘이 그 모습을 보고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의 생각을 들으시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무엘은 다른 이에게서 여전히 사울의 그림자를 찾고 있었습니다. 인물이 좋고 훤칠하고 누가 봐도 왕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그런 이를 원했습니다. 또 끊어질 희망을 붙잡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울처럼 외모가 번듯한 사람이 아닌 중심을 보신다고 하십니다. 엘리압에게는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중심이 없었습니다. 그 이후에 이새의 아들 아미나답 삼마 그 외에도 일곱아들이 다 지나갔습니다. 일곱은 완전수를 의미합니다. 이새가 생각할 때 왕이 되기에 좋다고 생각한 자녀들을 다 내보냈는데 아무도 왕의 재목이 아니었습니다. 사무엘이 말합니다. 아들이 이게 다입니까? 이새가 대답하기를 막내가 있는데, 양을 치고 있다고 합니다. 2주 전에 목자에 대한 설교 들으신 것이 기억이 나실텐데 양을 치는 일은 궂은 일이고 힘든 일입니다. 아들들 중에 사랑받고 인정 받는 자녀가 하는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은 그 양을 치고 있는 다윗이었습니다. 이새의 희망은 일곱아들들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남기신 소망은 다윗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중심을 보시고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라 하셨습니다. 다윗의 중심은 무엇입니까?
16장에서는 찾을 수 없지만 17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7장에는 골리앗이 하나님 모욕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다윗이 골리앗과 싸워서 이기는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를 믿는 믿음으로 나아가서 승리합니다. 다윗의 중심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구원이 오직 하나님께 난다고 하는 믿음입니다. 이새의 일곱아들들에게는 이런 믿음이 없었습니다. 이새의 희망인 아들들은 골리앗 앞에서 꺾였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마련한 소망인 다윗은 골리앗을 이겼습니다. 남 보기엔 보잘 것 없고 천한 일을 하는 다윗입니다. 희망이 없어 보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이 이스라엘의 소망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망 가운데 소망을 마련하시되 우리가 희망을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상황 가운데 소망을 마련하십니다. 다윗을 통해 그리스도를 남기실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남들이 말하는 희망에 우리 삶을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 소망을 두셨음을 믿으며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세상의 희망은 모두 꺾여도 하나님께서는 절망 가운데 소망을 남겨두시는 분입니다. 이 소망은 그리스도를 통해 펼쳐집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받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갑니다. 다른 이들은 세상의 희망을 찾고 영원한 소망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꺾여버릴 희망을 말할 때 소망을 노래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