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이 욕망을 초월하도록 하라

사무엘상 강해 시리즈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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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새벽기도에 오신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은 욕망과 복음의 관계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복음과 욕망은 양립할 수 없고 오히려 반대의 성향을 지니는데 우리는 이 복음과 욕망의 성격을 잘 파악해서 욕망이 복음에 앞서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1- 욕망은 복음 보다 앞서려 한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욕망은 복음보다 앞서려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18장부터 시작해서 사울이 다윗을 질투해서 다양한 모양으로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충동적으로 다윗을 죽이려고도 하고 자신의 딸을 미끼로 이용해서 어떤 상황을 만들어서 죽이려고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노골적으로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1절에 보시면 사울이 그의 아들 요나단과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고 합니다. 공식적으로 사울 정권의 대적으로 다윗을 대놓고 지목한 것입니다. 본문을 보시면 몇몇의 신하에게 비공식적으로 명령한 것이 아니라 공식적으로 명령했습니다. 여태까지는 자신이 혼자 충동적으로 죽이거나 다윗이 죽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비공식적으로 다윗을 죽이려고 했는데 이제 다윗 암살을 비교적 공식화해서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사실 다윗이 죽을만한 행동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지혜롭게 행했고 전쟁에서 늘 승리했습니다. 블레셋과 싸워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대적하는 이들을 물리치고 하나님 나라 확장에 기여했습니다. 다윗은 정치적으로도 신앙적으로도 이스라엘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왕이 죽여야 할 적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것은 복음이 중요한지 욕망이 중요한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정답을 이야기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아주 논리적으로 말합니다. 5절과 6절을 보면 다윗이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블레셋과의 전쟁에 나섰고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셨는데 다윗이 사울에게 잘못한 적도 없었는데 왜 죽이냐고 논리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이 본문에서 요나단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요나단은 사울이 자기 욕망 때문에 말도 안되는 판단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짚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나라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다윗이 블레셋을 잡고 있는데 하나님 나라의 원수를 잡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는 사역을 하는데 전혀 그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하는 복음의 사역보다는 자신이 왕위가 위태로울까봐 걱정을 합니다. 사울의 왕위 자체가 복음의 사역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통당하는 것을 구하고 전쟁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있는 자리인데, 그 사명은 까먹고 오로지 자신의 왕위,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을 놓치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꽉차있습니다. 사울에게 있어서 욕망이 복음을 앞서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욕망의 특성입니다. 욕망은 끊임없이 복음을 앞서려 하고 심지어 비논리적인 주장과 행동까지도 서슴없이 하도록 합니다.
(적용) 이것은 우리도 범하는 실수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견고하게 복음만 주장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욕망의 힘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욕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합니다. 욕망의 가장 큰 무기는 합리화입니다. 내가 이 정도는 누려야지 이건 내 권리인데 내가 누려야지 하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 주신 시간이 있고 물질이 있고 재능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걸 온전히 내가 누려야 한다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이건 내가 열심히 일해서 내가 얻은 것인데 내가 누려야 한다고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 욕망은 합리화라는 무기를 통해 복음과 교회를 앞서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욕망이 복음을 앞지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 우리의 사명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위해 교회를 세우기 위해 부름 받았다는 것을 되새기고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면 욕망이 복음을 앞지르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사울이 블레셋을 물리치는 자신의 사명을 생각했더라면 블레셋을 물리치는데 혁혁한 공과를 세운 다윗을 죽이려고 못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사울이 불신앙으로 인해서 자기 사명을 못하고 있는 상황에 자신의 사명을 대신해서 블레셋을 물리치는 다윗을 오른 팔로 삼아서 다윗을 더 세워주고 구약 교회인 이스라엘을 더욱 견고하게 세워나갔을 것입니다.
2- 복음이 욕망을 앞지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은 복음이 욕망을 앞지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기에 가장 합당한 모델이 바로 요나단입니다. 생각해보면 다윗이 승승장구 하는 이상황에서 세상적으로 가장 피해를 볼 사람은 사울이 아니라 요나단입니다. 그래도 사울은 왕으로 선택받아서 왕으로서 직무를 해보고 영광도 누려본 사람입니다. 만약에 이 상황에서 다윗이 왕이 된다면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왕으로 역사에 남고 요나단은 그저 왕자로 남습니다. 물론 사울이 요나단에게 왕위를 물려주면 사울의 왕조가 지속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겠지만 그렇게 못한다고 해도 아예 왕이 되지 못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입장에 있습니다. 사실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요나단이 사울을 부추겨 가지고 저 다윗이 건방집니다. 죽여야 합니다 라고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사울은 왕을 해봤고 요나단은 아닌데 요나단이라고 왕자의 자리에서 끝내고 싶겠습니까? 사실 요나단도 사울 못지않은 전쟁영웅이고 어떤 면에 있어서는 사울보다 더 지혜롭고 용감한 무장이었습니다. 자신이야 말로 사울의 뒤를 이어서 사울이 못했던 것을 이뤄낼 차기 이스라엘 왕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럴만한 혈통적인 명분, 업적의 명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단은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았습니다. 욕망이 복음을 앞지르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요나단은 사울이 무엇을 잘못하는지 알았고 앞으로 구약교회인 이스라엘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왕이 되려고 발악하고 애쓰지 않았습니다. 사실 발악하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하면 은근히 그것을 방관해서 다윗이 죽도록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드는 것을 방관해서 자신이 이 다음에 올라갈 왕위를 지키면 됩니다. 너무 자기 욕망이 티가나면 사람들이 볼 때만 좀 살려주시죠 하고 못 이기는 척 이 상황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런데 요나단은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 앞에서 적극적으로 다윗을 대변했습니다. 심지어 19장 2절에 다윗을 몰래 만나서 내 아버지 사울이 널 죽이려고 한다고 다윗의 암살에 대한 정보를 전달해주기도 합니다. 요나단은 철저하게 자신의 욕망을 극복해서 욕망이 복음을 앞서지 못하고 복음이 역사하도록 했습니다. 심지어 요나단은 자신의 욕망을 극복할 뿐만아니라 복음에 대한 순수한 고백으로 사울의 욕망또한 억제합니다. “다윗이 뭘 잘못했습니까?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습니까?” 라고 이야기 합니다. 심지어 이 때의 요나단은 지난 번 본문의 다윗보다 훨씬 낫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사명을 좀 더 쉽게 이루기 위해 사울의 사위가 되려고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와 대조적으로 요나단은 왕자라는 배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배경이 가져다주는 왕위에 대한 욕망을 극복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요나단이 어떻게 이렇게 욕망을 극복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사무엘상 15장 28절이 그 답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이 어떤 말씀입니까? 사무엘의 예언인데 사울 대신에 다른 이웃에게 왕위를 주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했습니다. 아마 이 말씀이 요나단으로 하여금 자신의 아버지가 왕조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왕조를 이루어야 한다는 결심에 이르게 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요나단의 모습은 마치 본디오 빌라도를 떠오르게 합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요나단과 딱 반대로 행동한 사람입니다. 요나단 같은 경우 가만히 있으면 사울이 일하는대로 입 다물고 얌전히 처신하면 왕의 자리를 순탄하고 무탈하게 이어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서서 다윗의 목숨을 살린 사람입니다. 이 반면에 본디오 빌라도는 자신의 인기를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만한 죄목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면서도 백성에게 인기를 얻고 싶으니까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변호하지 않고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 사형대에 내어 줬습니다. 본디오 빌라도 같은 경우 민심이 흘러가는대로 분위기가 이끌어가는대로 행동하고 재빨리 자신이 살길을 찾은 사람이지만
요나단은 분위기가 이끌어가는대로 행동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린지 확실하게 판단하고 행동한 사람입니다. 그는 철저하게 복음이 욕망을 앞서도록 했고 이것을 넘어서서 다른 이의 욕망이 복음을 넘어서지 못하도록 지키는 역할까지 감당했습니다.
(적용) 우리는 어떻습니까? 욕망이 복음에 앞서나가지 못하도록 투쟁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남들이 하는대로 은근히 그 분위기를 타고 흐름을 타서 나의 욕망을 이루고자 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욕망은 집요해서 다른 사람이 우리가 욕망을 표출할 수 있는 판을 깔아주면 아닌 척하면서도 그 분위기에 편승하고 내가 욕구하는 것을 가지려는 특성이 있습니다. 너무 무서운게 주변에서 판을 깔아주고 분위기를 만들어줘서 잠시 잠깐의 시간만 지나면 내가 욕망하는대로 그림이 갖춰지는데 이 유혹을 끊어내는 것이 너무나도 어렵습니다. 내가 가만 있을 때 시간이 좀 지나면 내가 하고 싶은대로 되는데 그 시간을 잠깐 스톱해서 작전타임을 가지고 나의 욕망이 복음을 앞서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욕망을 앞서도록 흐름을 뒤틀고 나서서 일을 만드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으로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주변의 분위기가 은근히 나의 욕망을 표출시킬 환경을 만들어줄 때 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대해 노라고 대답할 수 있는 순발력과 대담함을 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결론
설교를 맺겠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우리는 욕망이 복음을 앞지르는 삶을 멀리하고 이 복음 때문에 나의 욕망을 절제하고 이 복음이 나의 욕망을 초월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이 우리 인생을 가장 복되게 하고 행복하게 할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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