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담아낸 일상을 살아가는 백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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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오늘 본문은 성도가 복음과 일상을 균형 있게 잘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 하나님의 백성은 복음에 신실한 삶을 산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하나님의 백성은 복음에 신실한 삶을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제 본문에서 사울이 굉장한 모욕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이스라엘의 전쟁 영웅으로서 쌓아놓은 공이 있고 왕자의 지위도 있는데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무지막지한 사울의 막말을 듣고 무시를 당했습니다. 이정도 되면 복음에 대한 헌신이 약해질 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은 모습을 보게 됩니다.
35절에 아침에 요나단이 다윗과 정한 시간에 들로 나갑니다. 아버지한테 어제 그런 이야기를 들었으면 내가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을텐데 다윗과의 약속을 잊지 않고 그 자리에 나왔습니다. 다윗을 두둔하다가 모욕을 당했지만 다시 다윗을 살려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정해진 시간에 들로 나갔습니다. 요나단은 전날에 사울로부터 회유도 당하고 모욕도 당했습니다. 다윗만 없으면 요나단의 나라가 든든히 설 것이라는 보장을 들었고 다윗을 두둔했다고 패악무도한 계집의 소생이라는 모욕적인 말도 들었습니다. 다양한 언어로 하나님의 나라를 무너뜨리고 요나단의 나라를 세워보자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요나단은 거기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다윗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들판으로 나아왔습니다.
만약에 이 들판에서 요나단이 다윗을 잡아서 사울에게 넘겼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요나단이 활을 가지고 갔었는데 눈 한 번 딱 감고 다윗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눈 한 번 감고 저질러버리면 요나단의 시대가 옵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다윗과 한 약속을 신실하게 지킵니다.
36절에 요나단은 데리고 있는 아이에게 “내가 화살을 쏘면 주워오라”고 이야기합니다. 20장 21절과 22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아이가 화살을 주워올 때 요나단의 대사를 통해 들판 어딘가에 숨어있는 다윗에게 어떻게 행해야 할지 신호를 줄 수 있습니다. 요나단이 아이에게 화살이 ‘네 이쪽에 있다.’라고 이야기하면 다윗의 신변은 보장이 되는 겁니다. 사울이 더 이상 다윗을 해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요나단이 아이에게 “화살이 네 앞에 있다.”라고 하면 다윗은 이제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며 자신의 갈 길을 가야 합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이 화살을 쐈습니다. 아이의 머리 위로 멀리 화살을 날렸습니다. 아이가 날아간 화살을 찾아 거의 그 화살있는 곳에 다다랐을 때 요나단이 말합니다. “화살이 네 앞에 있다.” 이렇게 말하면 무슨 뜻이라고 했습니까?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기 때문에 다윗이 자신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여기서 요나단이 마음을 잘못 먹었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실질적으로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벼르고 있는데, 사울이 만약에 사울이 다윗을 죽일 생각이 없는 것으로 신호를 보냈더라면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울은 말 한 마디로 별 어려움 없이 자신의 왕국을 세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신실함을 잊지 않았습니다. 약속시간에 나왔고 다윗을 밀고하지 않았고 암살하지도 않았습니다. 다윗에게 잘못된 정보를 줘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왕궁으로 유인할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장차 왕이 되어야 하는 다윗을 지켰습니다. 메시아의 조상이 되어 구원역사를 이루는 일꾼이 될 다윗을 지켰습니다. 요나단은 어떤 어려움이나 유혹이 와도 그는 자기 욕망에 헌신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이 이렇게 다윗에게 충성을 다하며 복음에 신실한 삶을 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언약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가 나중에 왕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요나단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사울의 왕조가 망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예언하셨기 때문에 기정사실화 된 일입니다. 이 기정사실화 된 가문의 몰락 가운데 요나단이 다윗을 왕으로 여기고 다윗을 살리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요나단의 후손은 다윗의 대적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알았기에 요나단은 다윗에게 충성을 다하며 동시에 복음에 신실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42절에 요나단은 다윗과 요나단 사이의 언약에 하나님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이 있었기 때문에 메시아 왕조를 이을 다윗에게 충성할 수 있었습니다.
(적용)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어떤 상황이 와도 복음에 신실할 수 있습니까? 복음을 저버리면 큰 이익이 돌아올 수 있는 상황이 옵니다. 복음을 저버지리 않으면 큰 손해를 볼 수 있는 상황이 오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메시아의 왕조를 섬기기로 한 요나단처럼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를 섬기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42절에 보듯이 요나단과 다윗 사이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우리와 교회 사이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에 신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 가운데서 복음의 가치를 지키고 복음을 전하며 세상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켜 나가며 살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 삶을 신실하게 감당한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은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 삶을 신실하게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요나단이 화살을 쏘는 것으로 다윗에게 사울을 피해 떠나라는 신호를 준 후에 40절에 자신과 같이 온 아이에게 들고 온 활을 가지고 성읍으로 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윗과 요나단이 만나서 마지막으로 인사를 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요나단에게 세 번 절을 합니다. 그리고 다윗과 요나단이 서로 입을 맞추며 눈물을 흘립니다. 이것을 보고 소위 퀴어신학자라고 해서 성경에 있는 본문을 마음대로 틀어서 동성애를 합리화하는 사람들이 다윗과 요나단이 서로 동성애 관계에 있다고 해석합니다. 절대 잘못된 해석입니다. 당시의 문화에서 입맞춤은 인사였습니다. 이 장면은 연애를 하는 장면이 아니라 역모를 꾀하는 듯한 장면입니다. 로맨틱한 상황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급박한 그런 상황입니다. 동성애가 맞다는 자기 생각을 자꾸 본문에 우겨 넣으니까 엉터리 성경해석이 나오는 것입니다.
어쨌든 요나단과 다윗은 믿음의 동역자로서 서로에게 작별인사를 합니다. 요나단과 다윗 사이에 하나님이 있음을 확인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둘은 서로 다른 입장에 있지만 동역자입니다. 그것도 여호와 하나님이 너와 나의 후손들 사이에 영원히 있을 것이라 이야기 합니다. 다윗은 일어나서 떠나고 요나단은 다시 성읍으로 갑니다.
요나단의 생각에 다시 왕궁으로 돌아가고 싶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돌아가봤자 악령에 들려서 자꾸 위험한 행동과 무례한 행동을 하는 아버지에게 시달려야 할 지도 모릅니다. 요나단에게 사울은 가족이면서 상관입니다. 아들로서도 얼굴을 봐야 하고 직장에서도 얼굴을 봐야 합니다. 시종일관 다윗 이야기를 하고 다윗을 죽여야 한다고 이야기 하고 요나단을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바보처럼 여길지 모릅니다. 또 어머니를 들먹이며 막말을 하고 상처를 줄지 모릅니다. 그런데 요나단은 다시 성읍으로 향합니다. 요나단은 분명 믿음안에서 다윗을 사랑합니다. 아마 요나단에게 다윗을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사울이 쥐고 있는 정권이 망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윗이 다스릴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울이 다스리는 나라에 헌신해봤자 사무엘의 예언을 근거로 봐서는 그 나라가 잘 될 리가 없습니다. 요나단이 아무리 그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고 충성하고 희생해도 예언적인 관점에서 그 나라는 더 이상 나아지지 않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차라리 다윗과 함께 하며 야인이 되어서 세력을 모아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준비를 하는 것이 더 좋아 보이지 않겠습니까? 사무엘상 본문을 쭉 보면서 요나단에게 인망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메시아에 대한 신앙이 이렇게 확실하게 있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려고 몸부림치면서 사는데 요나단이 따르는 사람이 아예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요나단은 전쟁 영웅이고 왕자고 충분히 그를 추종하는 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요나단이 사람을 모아도 충분히 모아서 다윗에게 합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무너지는 나라의 왕자가 아니라 새로 들어설 나라의 개국공신이 되어서 한 번 멋지게 뜻을 펼쳐보고 싶은 생각이 없었겠습니까? 집에 들어 가봤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타박을 주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들판에는 요나단이 좋아하는 동역자가 있습니다. 함께 하는 것 만해도 기쁜 사람이 있습니다.
요나단은 어디 가기를 선택했습니까? 다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선택했습니다. 다윗을 따르면 짜릿하고 새로운 나날들이 기다리고 있을텐데 그는 다윗에게 가지 않았습니다. 다시 아버지에 등쌀에 시달리는 지긋지긋한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복음에 신실하라고 해서 그 말의 뜻은 일상을 엉망으로 지내라는 말은 아닙니다. 일상도 함께 신실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요나단의 내면에는 메시아의 왕조가 출범하길 소망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일상에 대한 책임감도 있습니다. 다윗은 들판에서 야인으로 생활하며 힘을 모아 하나님 나라를 이룰 소명이 있고 요나단에게는 무너져가는 나라지만 그곳에서 자신이 할 일을 찾고 최선을 다할 소명이 있습니다. 거기서 때론 아버지의 등쌀을 받아내면서 아버지를 설득하면서 다윗을 저지하려는 것을 막기 위한 소명이 요나단에게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 사울이 앞으로 십년 가량 다윗을 쫓아다니는데에 혈안이 되어 자신의 사명을 소홀하게 할 때 그 사명의 공백을 이제 요나단이 채우기 위해 애써야 할 것입니다.
(적용) 때론 우리의 일상이 지긋지긋 할 때가 있습니다. 매일 돌아오는 지겨운 집안일, 매일 똑같은 말만 하는 직장 상사, 매일 반복되는 업무,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하루의 연속입니다. 복음을 위해 산다고 하면 때론 고난을 겪으면서 하루 하루 특별한 일들을 겪으면서 드라마처럼 영화처럼 다이나믹하게 살고 싶은데 사는 게 항상 똑같고 고민도 똑같고 힘든 것도 똑같습니다. 지겨운 일상의 연속입니다.
하지만 이 일상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사역지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나단이 이 이후에 어떻게 사울의 왕궁에서 지냈는지 성경은 제대로 기술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요나단의 일상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요나단 정도면 다윗의 오른팔로 새로운 왕조의 개국공신으로 쓰임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인데 하나님은 요나단을 다시 왕궁에 가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땐 다윗과 함께 이스라엘의 들판을 누비며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은 요나단에게 지겨운 일상을 감당하도록 하셨습니다. 성경에도 기록되지 않은 뻔한 일상 혹은 다시 아버지에게 시달리는 지긋지긋한 일상을 보내도록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다가 준비 된 때에 다시 사무엘상 23장에서 다윗이 목숨의 위기를 겪을 때 다윗을 돕는 역할을 해냅니다.
복음에 신실한 사람은 우선 자신의 일상을 잘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가진 믿음을 일상에서 꾸준히 나타내고 증명하며 필요한 때에 믿음의 행위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기여합니다. 일상이 없는 복음은 육지에 띄운 배와 같습니다. 배는 육지에서 움직일 수 없습니다. 바다라는 일상이 있어야 복음이라는 배가 힘차게 전진합니다. 일상은 복음을 담아내는 그릇입니다. 복음에 신실한 사람은 자신의 일상에서 묵묵히 복음을 담아내고 드러내고 전합니다. 일상에서 자신의 삶을 잘 감당해서 어느 순간에 복음의 가치가 드러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다가 보면 언젠가 하나님께서 결정적인 순간에 사용하십니다.
결론
설교를 맺겠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은 복음에 신실하게 헌신합니다. 그리고 복음에 헌신한다고 일상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일상 가운데 복음을 묵묵히 담아내며 복음을 드러내는 삶을 감당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은 일상 가운데 복음을 담아내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복음과 일상을 신실하게 감당하시는 복된 하루 보내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