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에서 사명으로

사무엘상 강해 시리즈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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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새벽기도에 오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약한 자를 구원하시고 사명의 길을 허락하신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약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본문)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하나님께서 약한 자를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골리앗의 칼을 가지고 블레셋으로 망명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망명시도는 실패로 끝납니다. 다윗이 생각했던 것보다 다윗에 대한 반감이 컸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블레셋에 들어온 것에 대해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그곳에서 침을 흘리며 미친체를 합니다. 그것을 통해 블레셋을 벗어나게 됩니다. 그 이후 다윗은 아둘람이라는 굴로 도망을 옵니다. 아둘람의 뜻은 피난처라는 뜻입니다.
다윗이 아둘람으로 도망 쳤을 때 다윗의 형제와 아버지와 온 집이 듣고 다윗이 있는 곳으로 피했습니다. 이 사건 안에는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다윗이 그 집안에서 막내고 가장 천한 일인 목동일을 하게 되었는데 이새의 집안 사람들이 그 집에서 제일 보잘 것이 여김 받던 다윗에게 자신의 신변을 의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사울이 다윗을 찾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데 다윗이 어디 출신인지 알기 때문에 그 집안을 압수수색을 하고 신문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목숨의 위협도 했을 것이고 도저히 견디지 못할만큼의 어떤 괴롭힘이 있었기 때문에 다윗에게로 왔을 것입니다. 사울의 집요한 조사와 추적 때문에 그 어느 곳에서도 의탁할 곳이 없었고 결국 다윗에게로 왔습니다. 다윗에게 오면 그들이 살 수 있다는 소망을 품은 것 같습니다.
또 하나 생각해볼 것은 다윗 집안의 사람들이 어떻게 다윗을 찾아 왔느냐 하는 것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 지금처럼 연락이 바로 바로 되는 것도 아니고 편지를 보내려고 해도 사울의 압박 아래 서신을 주고 받는 것도 여의치가 않았을텐데 어떻게 다윗이 있는 곳을 수소문해서 알아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렵게 다윗이 있는 곳을 알아내더라도 다윗에게 가는 여정이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나중에 이야기를 한 번 하겠지만 사울은 아마 전국 방방곡곡에 자신의 심복을 심어두고 백성들을 사찰했습니다. 내일 본문에서 놉 땅에서 사울의 부하인 도액이 다윗이 지나온 장소가 어디인지 보고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울은 전국방방 곡곡에 자신의 눈과 귀를 심어뒀습니다. 이런 상황에 다윗의 혈족이 그 모든 감시를 피해서 다윗이 있는 곳으로 찾아간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생명의 은혜,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2절에 보시면 다윗의 가족 외에 또 다윗을 찾아온 이들이 있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환난 당한 모든 자, 빚진 모든 자 마음이 원통한 자가 와서 다윗에게로 모였습니다. 다윗은 그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여기 우두머리는 히브리어로 사르라고 하는데 그냥 산적 두목 이정도가 아니라 지방의 수령 정도는 되어야 이 단어를 씁니다. 다윗은 자기 가족을 포함해서 연약하고 힘 없는 자들을 품는 리더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하여 당대 힘 없는 이들, 사울 정권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고, 고통 당하는 자들을 품으셨습니다. 구원역사적으로 생각할 때 굉장히 의미 있습니다. 다윗은 기름부음 받은 자입니다. 히브리어로 기름부음 받은자는 메시아입니다. 메시아의 헬라어는 그리스도입니다. 다윗은 구약시대의 임시적인 그리스도입니다. 다윗이 연약한 자들, 힘없는 자들의 우두머리가 된 것은 그들을 사악한 사울의 치하에서 구원한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연약한 우리를 구원해주신 사역을 구약 성경에 미리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다윗이 연약한 자의 우두머리가 된 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자를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힘 없는 자들, 연약한 자들이 다윗에게 찾아올 수 있었던 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나중에 사울이 놉이라는 지역의 제사장들을 다 몰살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사울은 굉장히 집요하고 악한 방식으로 백성을 다스립니다. 사울의 눈 밖에 나면 오직 죽음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에서 연약한 자, 힘 없는 자들이 아둘람 굴로 올 수 있었던 것은 약한 자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의 그리스도인 다윗에게, 예수님의 조상인 다윗에게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환난 당한 삶, 원통한 삶, 빚져서 언제 종이 될지 모르는 그런 삶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아둘람, 피난처로 인도하셨습니다.
(적용) 사울이라는 집요하게 악한 왕이 다스리는 시대에 400명의 약자들이 다윗에게 피한 것처럼 하나님은 악하고 패역한 시대에도 구원의 사역을 하십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에 짓눌려 세상에서 갈 길을 알지 못하고 찾지 못하던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교회라는 아둘람으로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환난당하고, 고통당할 때 그리스도 계신 교회로 옵니다. 교회에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은혜로 일어서고 힘을 얻습니다. 이렇게 아둘람으로 피한 자들이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사무엘상 23장에서 그일라라는 곳에서 블레셋을 물리치는 사역을 감당합니다. 세상의 연약한 것들 미련한 것들을 들어 쓰시는 분이 연약한 자들이 그일라를 구원하는 다윗의 사역에 동참하도록 하십니다. 세상이 어려워서 교회로 피한 우리도 교회에서 힘을 얻어 다시 세상이라는 그일라고 갑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합니다. 이것이 바로 연약한 자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2- 새로운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은 하나님은 우리를 새로운 길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3절에 보시면 다윗이 모압왕에게 찾아갑니다. 모압은 다윗의 증조할머니인 룻의 출신지입니다. 룻은 자기 나라를 떠나서 이스라엘에 편입되었지만 다윗은 그 혈연에 의지하여 자신의 가족을 지키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 대목은 나오미가 이스라엘을 떠나 모압에서 머물렀던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우리는 다윗이 이렇게 모압에서 머물면 안 된다는 것을 룻기를 통해 이미 알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선조가 했던 실수를 해선 안됩니다. 그리고 지난 번에 블레셋에 머물렀던 것처럼 이와 비슷한 실수를 해선 안됩니다. 다윗은 그 어떤 나라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부름받은 그 소명을 의지하고 그 소명으로 부르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3절에 다윗은 모압왕에게 가서 다윗의 진로가 결정되기까지 모압에 자신의 부모를 의탁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아둘람에 있는 요새에서 머무릅니다. 그리고 본문 5절에 보시면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갓이라는 선지자입니다. 3절에 다윗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지를 내가 알기까지라는 말이 나옵니다. 다윗이 말한 대로 하나님께서 그 답을 알려주십니다. 답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주십니다. 선지자 갓은 누구인지 자세히 나오지는 않지만 나중에 다윗이 왕이 되면 다윗왕조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이 선지자 갓은 다윗에게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시점에 사울 정권이 무너질 것이다. 어느 시점에 무엇을 해야 왕권을 잡을 수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습니다. 최소한 어디로 피해 있어라 이런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다윗에게 이 요새에 머물지 말고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갓은 다윗에게 요새에 머무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요새에 머무는 동안 그의 부모를 모압에 의탁했는데 다윗이 요새에 머물지 않으면 그의 부모도 모압을 떠나야 합니다. 갓은 다윗이 세상의 나라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보장하는 안전함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사명을 감당하는 자리로 나아가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 내용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명을 감당할 자리로 나아가라고 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 말씀에 순종해서 헤렛이라는 수풀에 들어갑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새로운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피난처에서, 요새에서, 모압 왕의 성에서 피해있고 숨어있는 입장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길로 다윗을 인도합니다. 어떻게 보면 다시 이스라엘로 들어가는 것은 자살행위입니다. 도처에 사울의 스파이가 깔려있고 사울은 어떻게든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겉보기엔 죽으러 가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이 죽음의 길로 다윗을 인도합니다. 하지만 이 길을 가는 것에 있어서 다윗이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이 길은 결코 죽음의 길이 되지 않습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길이 됩니다. 이전에는 공포의 길이었지만 그 길이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면 이제는 그 길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길이 됩니다.
(적용)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로운 길로 인도하십니다. 선지자 갓을 통해 말씀을 전달하셔서 다윗을 인도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새로운 길로 가길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셨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가면 그 길은 결코 편하지 않습니다. 스데반이 순교한 것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수많은 어려움과 박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으라 합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심지어 사마리아 굳이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고 하십니다. 이때까지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혀 가지 못한 방향으로 그렇게 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명의 길을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새로운 길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편안한 요새를 떠나야 합니다. 나만의 편안을 추구하기 위해 쳇바귀처럼 만들어놓은 그 삶에서 떠나라고 하십니다. 힘 있는 모압 같은 것으로부터 떠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사명을 감당하는 길을 걸으라고 하십니다. 그 땅에는 죽음과 공포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여기있는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새로운 길을 갔으면 좋겠습니다. 이때껏 전도할 엄두도 못낸 사람에게로, 내가 힘들어하고 나를 낙심한 사람에게로, 나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로, 그간 붙잡지 못했던 기도의 자리로, 새로운 길로 가야 합니다. 우리가 안락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향해 갈 때, 사명을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일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결론
설교를 맺겠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자를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주시는 은혜로 기적적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원한 이들을 새로운 길로 내보내십니다. 안락함과 편안함에 계속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가서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십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구원 받은 우리는 새로운 길 가는 것을 사모 해야합니다. 이 말씀의 교훈으로 말미암아 귀한 삶의 열매 맺는 성도님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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