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대항하는 삶에서 벗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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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새벽기도에 오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 대항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관찰하고 이에서 벗어나는 지혜를 얻게 되길 원합니다.
1- 하나님께 대항하는 삶은 복음을 외면하는 삶이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삶은 복음을 외면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어제본문은 다윗의 이야기를 다루었는데 오늘은 사울을 중심으로 본문의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22장 1절에서 19절까지의 본문을 보면 대조되는 사람이 두 사람이 있습니다. 사울과 다윗이 대조되는 것은 물론이고 그 다음으로는 도액이라는 사람과 아히멜렉이라는 사람이 대조됩니다.
6절에 사울이 다윗이 유다 땅으로 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때 사울은 기브아 높은 곳에서 창을 들고 에셀 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사울이 창을 들고 있는 모습은 그가 얼마나 폭정을 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거나 화가 나면 다윗과 요나단에게 했듯이 항상 창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7절부터 사울이 그 자리에서 연설을 합니다. 그 내용은 다윗은 사울의 신하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밭도 주지 못하고 포도원도 주지 못합니다. 천부장, 백부장이라는 관직도 주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사울을 도와서 다윗을 죽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사울은 오히려 그의 신하들이 공모를 하고 사울에게 대적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요나단이 신하들을 선동해서 사울을 암살하려고 한다고 여깁니다. 다윗이 사울의 신하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울의 신하들이 공모를 하고 요나단이 사울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사울의 광기어린 말 안에는 늘 거짓이 있습니다. 다윗에 대한 증오가 사울에게서 합리적인 사고방식과 지혜를 빼앗았습니다.
놀랍게도 이 이야기에 반응하는 이가 있었습니다. 바로 도액입니다. 그가 원래 자기 역할에 충실했는지 아니면 포도원과 밭이라는 말에 현혹되어 나섰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에돔 출신인 도액은 순혈 이스라엘 사람 사이에서 사울의 편에 확실히 설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도액은 그가 높에 있을 때 아히멜렉이라는 제사장이 다윗에게 먹을 것을 주고 골리앗의 칼을 주었다는 사실을 사울에게 보고했습니다. 그래서 11절에 사울이 사람을 보내서 아히멜렉과 제사장들을 다 부릅니다. 그들이 사울 왕 앞에 도착했습니다. 사울이 아히멜렉에게 말합니다. “어떻게 이새의 아들과 공모해서 나를 대적해서 그에게 떡과 칼을 주고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서 그에게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게 하려 하는가?”
아히멜렉이 여기에 대해 대답합니다. 14절에서 그는 다윗이 왕의 모든 신하중에 다윗이 충실한 자가 없고 왕의 사위고 호위대장이고 왕실에서 존귀한자라고 합니다.
15절에서 아비멜렉이 내가 그를 위해 하나님께 물은 것이 오늘이 처음이니이까 결단코 아니니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문맥상으로 다르게 번역하는게 좀 더 좋습니다. 내가 그를 위해 하나님께 물은적이 단 한번도 없습니다.라고 번역해야 더 이해가 쉽습니다. 그렇게 물은 이후에 왕은 종과 종의 아비의 온집에 아무것도 돌리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허물을 돌리지 마라는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로 그는 다윗이 잘못한 것이 없는 존귀한 자라고 변호하고 아히멜렉이 다윗을 위해 하나님께 무엇을 물어본 적이 없다고 이야기 합니다. 아히멜렉은 이렇게 다윗을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동시에 자신의 결백을 주장합니다. 자신의 목숨을 위해서 다윗을 변호하기 보다는 다윗이 자신이 협박했다던지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겠지만 그런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다윗이 존귀한자라고 죽을 만한 죄를 지은 자가 아니라 변호합니다.
도액의 모습과 아히멜렉의 모습이 참 대조적입니다. 다가오는 메시아의 왕조에 대할 때 도액은 사악한 사울 정권의 하수인이 되어 메시아에 대한 소망과 전혀 상관 없이 살았고 아히멜렉은 메시아의 시대를 소망하며 다윗을 변호했습니다. 도액은 사울의 사악한 의도에 따라 하나님께 대항하며 복음을 외면하며 살았고 아히멜렉은 복음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구약의 이 시점에서 다윗을 살리는 것은 메시아의 소망을 기대하는 삶입니다. 그 시대에선 이것이 복음을 따르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란 이렇게 복음을 대하는 태도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복음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대항하는 이는 복음을 외면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복음을 외면하고 싶은 유혹이 반드시 찾아옵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것 복음이 지켜지는 것과 전혀 다른 행동을 할 때 나에게 유익이 주어진다면 복음을 외면하고 싶은 유혹이 듭니다.
내가 예수님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좀 손해보고 살면서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인정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이렇게 살면 너무나 손해보는 것이 많습니다. 내가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해야 하고 혹은 부끄러움을 겪고 갑이 되기 보다는 을이 될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외면하는 삶을 살면 너무나 편할 것입니다. 세상적인 기회가 주어질지 모릅니다. 도액이 적당히 현실에 타협해서 누가 봐도 정신나간 왕을 비호하며 멀쩡한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르도록 요구하며 그렇게 살면 당장 얻을 수 있는 것은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안락한 삶을 살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삶은 하나님께 대항해서 복음을 외면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가 드러나지 않는데 그런 삶이 어떻게 믿음생활이 될 수 있습니까?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2- 하나님께 대항하는 삶은 사람을 죽이는 삶이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삶은 사람을 죽이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다윗과 사울을 대조해서 살펴보도록하겠습니다. 아히멜렉이 다윗을 변호하고 자신의 입장을 변호한 뒤에 사울의 반응은 극단적입니다. 누가 들어도 아히멜렉은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어떤 도움을 받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히멜렉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사울이 호위병들에게 명하여 제사장들을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제사장은 레위지파의 가문이 그 직분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장 직분이 혈연을 중심으로 계승되었기 때문에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는 것은 곧 아히도벨의 가문을 몰살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정말 충격적인 명령입니다. 이들은 성막에서 섬기는 제사장들입니다. 제사장들을 통해서 백성들이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에서 아주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이 제사장을 다 죽이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 제사장들을 죽이는 것은 제사장들과 동시에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가 더 악화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신앙을 죽이고 그들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민수기 6장에 23절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최초의 대제사장인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 축복할 수 있는 권한과 의무를 부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복을 선포하시고 약속하십니다. 이런 제사장 가문을 몰살 시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선포되는 복의 흐름을 틀어막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없으면 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이 때 제사장을 복의 통로로 사용하셨는데 이 복의 통로를 없애라고 하는 것은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왕의 군사들이 제사장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아도 손대지 못합니다. 17절 마지막 부분에 제사장에 손대기를 싫어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18절에 사울은 도액에게 제사장들을 죽이라 명령합니다. 18절을 보시면 에돔사람 도액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도액은 순수혈통 이스라엘 사람보다는 제사장을 죽이는 일에 있어서 거리낌이 별로 없었습니다. 사울은 이것을 이용해서 세마포를 입은 제사장 85명을 죽입니다. 그 뿐 아니라 제사장들이 사는 놉 성읍의 남녀 아이들 젖먹이 아기들 키우는 가축도 다죽이라고 합니다. 사울은 제사장만 죽이라고 했지만 애돔 출신인 도액은 무자비한 사울의 칼이 되어 더 많은 것들을 죽입니다. 그곳에 사는 가축마저 죽입니다. 이 방식은 하나님께서 용서 받지 못할 이방 민족을 심판하는 헤렘이라는 전쟁방식을 생각나게 합니다. 복음에 대적하는 이방 민족을 철저히 심판하기 위해 남녀노소와 가축을 다 죽이는 이 방식을 같은 이스라엘 민족 그것도 제사장인 족속을 죽이는데 사용합니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일입니다.
본문의 이 장면은 다윗과 사울의 날카로운 대조를 볼 수 있습니다. 22장 2절에는 환난 당한 자 모든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 4백명이 다 다윗에게로 와서 살지 않습니까? 사울 정권 아래서 고통당하고 언제 죽임 당할지 모르는 이들이 다윗에게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왕의 손에 죽을 것이라 상상도 하지 못했던 제사장들은 사울왕에 의해서 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편에 서 있는 다윗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고 사울은 사람들을 죽이고 복을 틀어막는 일을 합니다. 이방인들을 제거할때나 쓰는 방법으로 잔인하게 사람을 죽입니다.
우리는 다윗과 사울의 이 대조에서 어떤 삶이 합당한 삶인지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삶은 사람은 살리는 삶이고 하나님께 대항하는 사람은 사람을 죽이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어떠해야 되겠습니까? 당연히 우리는 사람을 살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적용)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다른 이를 희생시키고 사용해선 안되는 수단까지 사용해서 다른 이를 해치는 삶은 결코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의 삶의 방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내가 힘들지만 나의 형편조차 어려워서 누굴 도우고 지킬 입장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살리는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의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사람에게 상해를 가하거나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에 대해 엄청난 패널티를 주기 때문에 우리는 물리적인 폭력을 휘두르거나 살인이 나는 것을 볼 일이 잘 없습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게 사람을 죽이는 일이 없다고 해서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인터넷의 댓글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습니까? 또 내가 무심코 한 카톡으로 인해, 순간의 감정으로 내뱉은 말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상처를 줍니까?
저한테 인격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제일 약한 부분은 바로 화를 참는 것입니다. 신대원 다닐 때 한 번 씩 족구를 하는데 제가 지는 것을 정말 싫어합니다. 한 번은 친구가 실수를 해가지고 헛발질을 하는 바람에 점수를 빼앗겼는데 그게 너무 분해가지고 아스팔트 바닥에다가 주먹을 쾅하고 찍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당연히 제 주먹이 깨지지 않겠습니까? 저도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그 때 순간 한 제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고 또 친구들도 엄청 황당하게 생각했습니다. 어떤 친구는 저의 별명을 지구와 맞짱 뜨는 남자로 지었습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부터 지금까지 사역하면서 사역지에서는 계속 조심을 하기 때문에 그런 적이 없지만 제 개인적인 삶을 살 때는 한 번 분노하면 끝을 모르고 화를 낸 적이 종종 있습니다. 제 자신에 대해서 가장 많은 화를 냈고 그 다음 동생, 부모님, 친구들 결혼해서는 아내에게 화를 내며 상처를 준 것이 얼마나 잘못된 행동인지 모릅니다.
물리적으로는 피부에 상처를 조금도 내지 않았지만 제가 화를 내고 말을 내뱉을 때마다 제 주변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상처를 받게 됩니다. 제가 칼을 들지 않아도 말이라는 칼이 저의 태도라는 무기가 다른 이에게 다른 이에게 상처를 줍니다. 이런 삶에서 벗어나려고 참 무던히 애를씁니다. 잘 되지 않지만 조금씩 나아지려 노력합니다. 제가 더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살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이제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겠습니까? 하나님을 따르는 삶을 산다고 하면 죽어가는 이들이 우리 품 안에서 살아나는 것을 경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낙심한 이들이 우리를 통해 힘을 얻고, 기도하는 교회를 통해서 불신자 지인들이 위로를 얻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디 저와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람을 살리는 사역을 하게 되길 바랍니다.
결론
설교를 맺겠습니다. 하나님께 대항하는 삶은 복음을 외면하고 사람을 죽이는 삶입니다. 우리는 이런 삶을 벗어나서 복음적인 삶의 태도를 지켜야 합니다. 복음 때문에 손해보고, 복음 때문에 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살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헌신과 위로와 격려를 통해 죽어가는 이들 낙심하고 절망하는 이들이 소망가운데 회복되는 일이 일어나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